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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유완영 IMRI 대표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PC용 모니터 수출시장 누벼 자그마치 컨테이너 20개 분량이었다. PC용 모니터 5천50대를 실은 배는 이미 독일에 도착해 있었다. 더 잘해 보겠다고 쓴 비싼 칩이 화근이었다. 뜻밖에 매킨토시에 연결한 모니터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지역에서 맥을 얼마나 쓰는지 몰라도 이 일로 신용을 잃을 순 없었다. 바이어인 바타비아 측에 전화를 걸어 “곧 날아가 물건을 풀기 전에 전량 고쳐주겠다”고 말했다.

직원 20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현지에서 10명의 인력을 더 구했다. 약속대로 1주일 만에 다 손을 봤다. “클레임을 걸겠다”던 담당자 입에서 “대만 업체 같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10만 달러 이상 되는 마진은 날렸지만 독일 유통업체들 사이에 IMRI라는 이름을 알렸다.

“유통업체는 살아 있는 생물체입니다. 제대로 관리를 안 하면 다른 데로 튀게 마련이죠. 지속적으로 새로운 모델을 준비해 마음을 사로잡는 길밖엔 없어요.”

TFT-LCD(초박막 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 등 PC용 모니터를 만들어내는 중소기업 IMRI의 유완영(39) 대표는 “임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날아가 바이어 얼굴 한 번 못 보고 돌아설 때의 허탈감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돌아올 땐 그야말로 고통의 시간이죠. 한 달에 네 번, 갈 때마다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들고 간 적도 있습니다.”

그 회사 역시 유럽 업체였다. 제품 디자인을 새로 할 때마다 금형값으로 5백만∼1천만원이 들었다. 그런 금형을 수도 없이 빠개버렸다. 지친 직원들 사이에서 “우리 실력으로는 안 되니 포기하자”는 말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상대방 업체 쪽에서 거래하자고 했을 땐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도이체방크가 대주주인 독일의 대형 유통업체 보비스 측으로부터는 직접 오지 말고 제품을 보내 보라는 연락이 왔다. 10번 이상 허탕을 치고 왔을 때였다. 그러고도 몇 번 더 날아갔다. 왕복 20시간 걸려 열일곱번째 방문한 끝에 그는 마침내 납품권을 따냈다.

IMRI의 사훈에 도전·창조와 더불어 패기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렇게 점철된 시장 개척의 역정이 있기 때문이다.

도전과 패기는 사실 유대표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그는 다리를 전다. 그가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경영자로 입신할 수 있었던 것은 긍정과 도전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집에 차가 있었지만 버스를 태워 학교에 보냈다. 마음이 많이 갔기 때문일까, ‘혹시 데려온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아버지는 그에게 혹독했다. 그런 아버지가 때로는 원망스러웠지만 그의 속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립심이 자라났다.

유년 시절 남들과 나란히 서고, 같이 뛰고 싶어 그는 보이스카웃이 됐다. “소아마비를 앓은 전력의 보이스카웃으로는 유일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학을 마치고 난 이듬해인 1988년 그는 옛 소련에서 보드카를 수입해 팔다 부도를 냈다. 들여와 납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게 화근이었다. 소련에 들어간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 적을 두고 소련의 기술을 국내에 소개하는 기술 복덕방 일을 했다. 번역 일·관광 가이드에, 잡지사 통신원 노릇도 했다. 타슈켄트에서 쌀을 실어다 모스크바에서 한인과 일본인들을 상대로 쌀장사도 해봤다.

처음 북한에 들어간 것도 호구지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반년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다. 밥이 그립던 시절이었다. 부도가 안긴 좌절감으로 한때 자살까지도 생각했었다. 그가 대표이사 사장이 아니라 회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해온 것도 2000년까지 신용 회복이 안 됐기 때문이다.

IMRI는 본래 컨설팅 회사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리말 회사 이름은 국제경영연구원. IMF 체제 당시 명성전자를 인수, 제조업에 진출하며 컨설팅 업무는 중단됐다. LG전자에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으로 TV를 납품하다 부도난 이 회사를 자산양수도 방식으로 성업공사로부터 넘겨받을 때 주변에서는 사양산업이라며 반대했다.

때마침 PC 모니터를 생산하던 신호전자·태일·대선 등이 줄줄이 부도가 났다. 유대표는 니치 마켓을 보고 뛰어들기로 했다. 수출에 주력함으로써 이런 우려는 자연히 불식됐다.

“컨설팅을 할 당시 페이퍼 워킹에 그치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수치를 나열하고 서류상으로 전략을 짜줄 뿐 CEO(최고경영자)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해줄 수 없기 때문이었죠. 제조업은 사실 컨설팅을 잘해 보기 위해 시작했어요.”

제조업 진출 3년여 만에 IMRI는 20종의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산량의 절반은 자체 브랜드로 팔고 있다. 나머지도 OEM이 아니라 제품을 개발해 납품하는 ODM 위주이다.

“드로잉 등 디자인 단계부터 유통업자와 협의를 합니다. 자기들이 선택한 모델이니만큼 만족도가 높고, 매출을 꾸준히 늘려나갈 수 있죠.”
이를 위해 IMRI는 대여섯 명의 디자이너를 두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생산량의 약 95%를 40개국 60개사에 수출했다. 이 중 60% 이상을 유럽 지역에 내다팔았다. 유럽 수출 물량의 70%를 독일에 팔았다. 그의 듀얼 시계 중 하나는 독일 시각에 맞춰져 있다. 수출 신장세도 눈부시다. 지난해 수출신장률은 전년비 60%에 달했다.

출장이 잦을 땐 일년의 3분의 2를 해외서 보내는 그에게 주위에서는 휠체어를 타라고 권한다.

“비즈니스맨이기 때문에 안 탑니다. 비즈니스맨이라면 힘들어도 그런 보조기구에 의지하지 말아야죠. 관광을 왔다면 모를까.”
IMRI는 R&D(연구·개발)에 꾸준히 힘쓰고 있다. 연간 R&D 투자 규모는 매출액의 5∼7% 선. 올해는 매출액 대비 12%를 잡고 있다.

이 회사는 경북 상주의 제1공장의 연구소 외에 서울 본사에도 정보기술연구소를 둘 계획이다. 이곳에서는 정보가전 제품의 개발을 맡기로 했다.

1백84명의 직원 중 연구소 쪽에 배치된 인력은 25명. 그 중 10여명이 LG전자 정보기술연구소 CT그룹장을 지낸 김현표 박사 등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들이다. 이 회사는 2월 말까지 연구·개발 인력을 40명 선으로 늘려 이들 인력의 비율을 20%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IMRI는 수출은 L/C(신용장) 베이스로, 내수는 현찰로만 거래한다. 외상매출 채권이 없으니 원천적으로 부실 채권이 생길 수가 없다. 당연히 대손충당금을 쌓을 일도 없다. 어음·당좌 거래를 하지 않으니 품질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지속적으로 다양한 사양과 디자인의 제품들을 선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15인치 모니터에 텔레비전 기능을 부가하고 리모콘 기능까지 얹어 팔고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 TV를 사는 것보다 남는 장사가 되도록 만든 것. 하나의 제품에 여러 가지 기능을 부가, 제품을 차별화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차별화하지 않고는 현금 장사를 할 수 없다.

유대표가 영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어음·당좌 거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금을 구하러 뛰어다녀야 했다면 제품 개발과 영업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어음·당좌 거래를 트지 않은 것은 IMRI의 신용으로는 IMF 체제 당시 어음·당좌 거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상 매출이 없다고 하니 외국의 거래처들도 환영했다. 거래해도 괞찮은 회사라고 평가한 것이다.

IMRI는 주문에 따라 생산하기 때문에 창고가 없다. 재고가 없기 때문이다. 공급 초과로 가격이 떨어질 일도 없다. 주문에 따른 생산은 또 계획 생산이라 효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주문을 받고 납품을 할 때까지 2주를 넘기지 않는다. 가동률도 자연스레 극대화되게 마련이다.

제품의 생산 기간이 짧은 것은 유대표가 직접 영업 현장에서 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주문을 따내면 공장에서는 곧바로 자재를 확보하는 등 납품 준비에 들어간다. L/C가 올 때쯤엔 보통 60% 이상 준비를 마친 상태다. L/C 베이스로 거래하면 다음달 물량을 미리 픽스시킬 수 있다.

현찰을 받고 물건을 내주면 바이어 쪽에서도 현금화하기 위해 물건을 빨리 판다. 외상으로 사들이면 나중에 팔아도 돼 천천히 파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금을 주면 부품도 좋은 것으로 받을 수 있다.

IMRI는 TFT-LCD를 드물게 삼성·LG 두 곳과 거래하고 있다. 두 회사에서 패널을 공급받아 자체 개발한 회로를 장착해 내보낸다.

TFT-LCD는 주문이 밀려 수요의 60% 정도를 충당하고 있다. 패널 공급이 원활치 않아 주문에 못 댈 때도 있다.

IMRI의 도전 정신이 꽃피운 곳은 대북 사업이다. 이 회사는 평양의 컴퓨터 모니터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최초로 북한 내수시장에 팔고 있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공장이다 보니 거기서도 좋은 인력을 배치해 줍니다. 우리 쪽에서는 기술을 제공하구요. 윈-윈 게임이죠.”

그는 남북경제협력 분야에서는 이미 정경분리의 원칙이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연평해전 때도 인천-남포간에는 배가 오갔습니다. 지난 10년간 남북의 정부간에 문제들이 있었지만 경협은 지속됐습니다.”

지난 1월 말 코스닥 등록 후 그의 지분율은 28%로 낮아졌다. 평가액은 1백10억원에 이른다.

유대표는 뇌성마비 환자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해마다 내고 있다. 다리를 저는 그에게 뇌성마비 환자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몸을 가누는 것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회성 불우이웃 돕기는 하지 않는다는 게 기부에 관한 그의 원칙이다. 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회사 차원의 기부도 하지 않는다.

“한 백년은 살아남는 기업으로 가꾸고 싶습니다. 어음·당좌 거래 안 하면 회사가 없어지거나 직원들이 흩어지는 일은 없겠죠. 1등은 안 할 거예요. 1등 하려면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2등은, 할 수 있다면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출처: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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