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정기 인사철 3월마다 사건 당사자 골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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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 알선 혐의로 지난해 9월 구속기소된 김모(60)씨. 김씨는 서울중앙지법의 한 형사재판부에서 다섯 달 동안 재판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 2월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이 연기됐다. 새 재판장이 부임한 것은 같은 달 25일. 김씨는 ‘재판부가 바뀌었으니 재판을 좀 더 받겠구나. 재판에서 무죄라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임 재판부는 재판 두 번 만인 지난달 14일 김씨에게 징역 3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가 부임한 지 보름여 만에 선고한 것은 이미 6개월을 거의 복역한 김씨의 구속기간 만료일(지난달 20일)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김씨의 죄가 무겁고 달아날 우려가 있어 풀어준 채로 재판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김씨로선 법원 인사 시기에 걸려 충분히 재판받지 못했다는 불만을 떨칠 수 없었다. 김씨는 선고 다음 날 즉각 항소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재판을 받는 사건 당사자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2월 법관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바뀌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관들의 인사 후 ‘적응기간’인 3~4월엔 사건처리율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해 3월의 경우 형사 사건 피고인 숫자는 1만2000명으로 평균 2만 명 수준인 다른 달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한 변호사는 “매년 봄마다 불편을 겪는 사건 의뢰인이 나오곤 한다”며 “재판은 신속성·예측가능성이 생명인데 인사철 전후에는 종잡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불편을 겪는 경우는 다양하다. 형사사건에선 ▶재판이 연기돼 무죄 선고를 받을지도 모를 피고인의 구속기간이 연장되거나 ▶인사 직후 구속만료기간에 걸려 새 재판부로부터 급하게 선고받거나 ▶인사를 앞두고 인사 대상 재판부로부터 재판을 재촉당하기도 한다. 돈 문제가 얽힌 민사사건에선 재판 일정이 어그러질 경우 분쟁 해결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 변호사는 “사건 당사자로선 일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될지도 모르는데 법원에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법원 측은 현행 인사 제도를 유지하는 한 일정 수준의 사건처리 공백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법원 관계자는 “서울 근무를 희망하는 법관이 대다수라 순환 근무를 위해 전국 단위 인사를 할 수밖에 없다”며 “1999년부터 인사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법관 3명이 재판을 맡는 합의 재판부의 경우 재판장은 2년, 배석 판사는 1년 동안 인사 이동이 없도록 조치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법원의 형사사건 평균 처리 기간(4개월)은 일본(8개월)에 비해 훨씬 짧고 민사사건 분쟁 해결 기간도 세계 2위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민사사건을 진행 중인 박모(45)씨는 “재판도 일종의 사법 서비스인데 ‘인사 이동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공급자 위주 시각”이라며 “요즘은 기업에서도 수시 인사가 대세인데 법원이 편의를 위해 일년에 한 번씩 인사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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