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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희망의 단계(2)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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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5년 전에 「득율풍」등장>
「득율풍」이라는 좀 괴상한 이름으로 전화기가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893년. 그로부터 9년 후인 1902년 3월 20일 한성과 인천사이에 공중(일반)용 전화가 개통되고 65년―전화의 역사는 개화의 발자취와 같았다.
당시 한성에 13대, 인천에 12대로 비롯된 우리나라의 전화는 오늘날 27만7천7백56대로 불어났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 세계 95개국과 통화할 수 있고 안으로는 전국 1,382면 중 1,212개 면에 전화가 통하고 있다.
신라 소지왕 9년(1500년 전) 우역제를 람상으로 싹튼 우리나라의 통신사업은 고려·이조를 거쳐 고종 21년(1884년) 10월 우정국의 개설로 현대식 우편제도의 창시를 보아 그해 12월 4일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보다 2년 앞선 82년 정부는 신문화의 도입과 보급에 따라 우정사를 설치, 개화파인 홍영식을 초대협판에 임명했었다. 일본과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은 선진 각국의 우편제도를 본 떠 84년 우정국의 개설까지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우정국 시연 때 갑신정변>
80년대 우리나라의 정정은 사대당과 개화당이 맞서 어지럽던 시기였다. 개화파인 홍영식은 우정국의 개설까지 우편제도의 개혁을 이끌었으나 정치·사회상의 일대혁신을 단김에 성취하려 했다. 일본을 배경으로 김옥균 서재필 등과 함께 그는 10월 17일 저녁 사대당 중신들이 전동에 있는 우정국 개국기념연회에 참석한 것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 변으로 민영목 민태호 등이 살해됐다. 그러나 개화당의 꿈은 청국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고 겨우 궤도에 오르려던 새 우체사업은 일시 중단의 비운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우리의 정정이 어수선한 동안 이 땅엔 이미 외국세력이 들어와 통신시설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진 1876년 부산에 그들의 우편국을 개설했고 84년 2월엔 부산과 일본 장기 사이의 해저전선을 깔아 전신국을 개국했다.
이 같은 일본측의 급격스런 진출에 불안했던 청국 또한 우리보다 앞서 그들의 손으로 85년 한성과 인천사이에 전신시설을 개통, 이어 평양 의주를 거쳐 청국 전선과 접속시켰다. 서로전선이라고 불리는 이 시설은 운용과 관리권이 청국 정부에 있었고 그들은 화전국(한성전보 총국)을 설치하여 그들 위주의 운영을 했던 것이다.
우리 정부가 주관한 최초의 전신사업은 서로전선보다 3년 후인 88년 6월 한성과 부산사이에 가설된 남로전선. 이어 91년 한성에서 춘천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북로전선이 개통되었다. 정부는 1900년 봄 독립된 체신사업관청으로 통신원을 창설하는 한편 일반용 전화사업을 벌이기로 하여 1902년 경인간 전화의 개통을 본 것이다.

<전어기 라고도>
영어의 「텔리폰」이라는 음을 그대로 따 「득율풍」으로 등장한 전화는 그 후 전어기로 바뀌었고 나중에 지금의 전화기로 쓰이게 됐다. 경인간 일반 전화의 개설은 1902년이지만 궁중엔 1898년 1월 28일부터 전화가 가설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궁내부가 관할하던 전화는 10여대, 궁내부에서 각 위문과 멀리는 인천의 해관까지 통하였다. 이 전하는 궁중전용이어서 일반에선 그 혜택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전화를 쓰면 아무리 관청이라도 돈을 내게 마련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던 모양으로 궁중전화를 가설한 각 부에서는 매달 17원을 궁내부에 물어야 했고.
경인간 공중용 전화가 개통됐을 때 전화 회선수는 4회선이었는데 가입자를 보면 한성에선 구락부, 전기회사, 법국주막사동아인가, 대창양행, 광선태, 서병규가, 천일은행 공정국 서성춘, 동순태(2명 불상) 등이었고 인천에는 함능가양행, 대창양행, 광선태, 미국인가, 천일은행, 서성춘, 동순태 (5명 불상)등이었다. 가입자가 매년 1백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두 번에 나눠 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가입자는 거의가 굵직한 화상을 비롯한 외인고객이었고 한국인은 서병규씨 한사람뿐이었다.

<66년말 현재 27만7천대>
해방이 되고 48년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통신사업은 낙후되어 있었다. 해방 당시 전국의 전화대수는 자석식. 공전식. 자동식을 통틀어 5만1천 여대뿐이었고 시설은 낡아 빠져 있었다. 그나마 6.25사변이 터지자 통신시설의 80%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정부환도를 계기로 자체재원과 외원을 받아 복구작업을 한 결과 59년엔 사변 전 수준까지 복구되었다.
5.16후 체신부는 체신사업 제1차 5개년 계획을 세워 1백 48억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1차계획이 끝난 66년말까지 당초 계획보다 5억원이 많은 1백53억원을 투자했다.
이에 따라 62년 1월 우리나라 최대로 3만회선의 최신식 「이엠티」자동교환시설을 갖춘 광화문 전화국이 개국되었고 시내 전화대수는 해방 당시 5만여대에서 66년 말에는 27만대 선을 돌파했다.
면 단위 통신망은 66년 말까지 1382개 면소재지에 전부 체편국을 설치하고 전화선을 끌어 완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재원 관계로 1백63개 면에는 이를 이루지 못해 67년 전반까지 미 수복지구 8개 면을 제외한 1백55개 면의 통신시설이 들어가게 돼 있다.
또한 빠른 시외통화를 위해 금년 7월 1일 서울과 부산에 시외전화국이 마련되고 「마이크로·웨이브」시설로 서울∼부산간이 7백8회선, 서울∼광주∼부산 사이가 5백40회선으로 늘어나며 서울∼강릉 사이는 1백20회선이 개통된다, 이 시설이 마련되면 경인간 TV중계가 가능하게 되어 부산에 앉아 서울의 TV중계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된다.
67년부터 시작된 제2차 5개년 계획에서 체신부는 5년 동안에 6백5억원 투자, 이제까지 양적인 시설확충을 해 오던 것을 기술과 질 그리고 양의 삼위일체가 실현되도록 펼쳐갈 계획이다.

<70년에 위성지상국 설치>
국제적으로 한·일 간의 통신수요의 격증에 따른 회선의 부족으로 68년 초까지엔 한·일간 신간선을 마련, 반자동식 교환방식에 의한 국제전화운영을 할 계획이다.
또한 금년 중으로 국제통신위성 기구에 가입―미국이 발사할 제3호 통신위성 「인텔세트」를 이용한 통신을 위해 4백만「달러」를 들여 70년까지 우리나라 지상국을 건설키로 하고 있다. 오늘의 통신기술은 바야흐로 단파 무선통신시대가 지나고 위성통신과 새로운 해저「케이블」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미 외국에서 실용화한 이 통신방법을 우리가 어떻게 빨리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느냐, 2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71년 말에 가도 수요의 66.4% 밖에 대지 못할 전화 기근을 어떻게 해소시킬 것이냐, 현재까지 받아쓴 2천4백40「달러」, 또 받아들일 차관을 어떻게 갚을 것이냐는 등 우리전기통신의 걱정은 아직도 크다. <글 이성구·사진 송영학>

<시점> 전화기 발명의 해로부터 92년간 세계에 1억9천5백만대 가설
1876년 미국「보스턴」대학에서 음성생리학을 가르치던「알렉잔더·그레이엄·벨」이 처음으로 자석식 전화기를 발명했다.
「벨」이 이 신기한 발명을 특허국에 특허 신청한 같은 날 같은 미국인 「크레」도 독자적으로 전화기를 발명, 특허를 신청했다.
그러나「벨」의 신청이 시간 차이로 빨랐기 때문에 판단 끝에 전화기 발명의 영예는「벨」에게 돌아갔고 「벨」은 세계최초의「벨」전화 회사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92년― 오늘날 세계에는 1억9천5백30만대의 전화가 가설되어 세계의 신경노릇을 하고 있다.
각국의 전화가입자와 인구 1백명에 대한 전화비율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인구대비)
한국 27만명(1.1) 미국 9,300만명(47.8) 서전 357만명(45.9) 캐나다 745만명(37.6) 스위스 225만명(37.7) 영국 1,070만명(19.4) 불란서 613만명(12.4) 서독 880만명(14.8) 일본 1,400만명(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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