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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빵과 양배추 수프 모르면 러시아를 아는 척도 하지 마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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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26면

저자: 석영중 출판사: 예담 가격: 1만8000원

종횡무진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인 듯싶다. 전작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와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통해 이 두 명의 세계적인 러시아 문학가의 작품과 정신세계를 대중의 눈높이에서 흥미진진하게 파헤친 고려대 노문학과 석영중 교수가 한층 더 넓고 깊어진 내공을 선보였다. 이번에 낚아챈 화두는 음식이다. 그는 푸슈킨부터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에 이르는 러시아 대문호들의 음식에 대한 생각과 식생활 습관, 작품 속 음식에 대한 묘사, 심지어 당대 서유럽 작가들 작품 혹은 오페라와의 비교를 통해 러시아 문화를 감싸온 두툼하고 무거운 외투를 단숨에 벗겨버린다.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사실 음식에는 한 나라의 문화가 집대성돼 있다. 따라서 음식에 담긴 의미를 모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수프다. 석 교수는 러시아 수프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으며 작품 속 시대 배경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진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 요리가 고급 요리로 간주되던 시절에 러시아식 양배추 수프는 낙후성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유럽 식문화가 러시아에 완벽하게 정착한 19세기 중후반이 되면 오히려 절제의 미덕을 표출하는 긍정적인 기호가 된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엽에 들어서면 동일한 수프가 지루하고 범속한 일상, 타파해야 할 과거의 구습을 뜻하고, 혁명 이후 고질적인 식량 부족으로 시달리던 소비에트 시기에는 생존 자체를 표상한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검은 빵’은 또 어떤가. 러시아인들에게는 검은 빵만이 빵이고 나머지는 빵이 아니었다. 춥고 겨울이 길고 가뭄과 기근, 침략과 내전에 시달리던 러시아에서 검은 빵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을 의미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삶 그 자체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손님에 대한 극진한 대접을 ‘흘레보솔스트보’라고 하는데 이는 직역하면 ‘빵과 소금’이라는 뜻이다.

종교가 러시아인들의 식습관에 미친 영향도 흥미롭다. 공산주의 혁명 전까지 900여 년간 국교(國敎)로 자리매김했던 러시아 정교는 한 해를 ‘금식 주간’과 ‘잔치 주간’으로 나누는데 금식 기간은 무려 192일에서 많은 때는 216일까지 됐다. 이 기간에는 아예 아무것도 안 먹는 지독한 단식에서부터 고기나 달걀, 유제품을 안 먹는 단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엄격하게 음식을 제한했다. 그러니 ‘잔치 주간’에는 말 그대로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밖에.

‘남의 요리’에 매료됐던 러시아인들이 ‘나의 음식’의 장점을 재발견하고 ‘남의 음식’과 ‘나의 음식’ 간의 충돌과 융합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냈다는 석 교수의 분석은 한식 세계화를 논하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하다.

문호들의 식생활도 재미있다. “점심에 먹을 수 있는 것을 저녁까지 미루지 마라”는 말을 남겼던 푸슈킨, 프랑스 문화 특히 프랑스 요리에 대한 반감을 러시아 상류층의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활용한 톨스토이,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식도락가이자 대식가였지만 거식증으로 죽음을 맞은 고골, 평범한 가정식 백반으로 닥터 지바고의 영혼을 표현한 파스테르나크,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의 식사를 통해 인간의 높고 고결한 정신을 노래한 솔제니친 등에 대한 흥미진진한 기술은 러시아 문학과 문화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기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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