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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사고 잘 고르고 오래 입어라 지구 환경 생각하며”

중앙선데이

입력

28일 막을 내린 통영국제음악제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건 개막작 ‘세멜레 워크’였다. 헨델의 1743년 작품인 오페라-오라토리오 ‘세멜레’를 뮤지컬과 연극적 퍼포먼스 형태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2010년 독일 하노버에서 초연된 이후 아시아에서 열리는 첫 공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대의상을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이자 1970년대 ‘펑크의 대모’인 비비언 웨스트우드(72)가 디렉팅했다는 사실이 일찌감치 관심을 모았다.

이 패션 디자이너와 클래식 공연의 조우에는 단순하지만은 않은 배경이 있다. 우선 반권위주의를 내세운 펑크룩과 당대 기존 구조를 깨뜨리려 했던 바로크라는 시대상이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환경운동을 펼치는 웨스트우드의 최근 행보와도 연관이 깊다. 그는 서 패션쇼장에서 모금을 하고, 캠페인도 벌이며, 무심한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번 공연 역시 환경운동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삼았다고 한다. 이 노장 디자이너가 세상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e메일을 띄워 답을 들어 봤다.

기존 컬렉션에서 뽑아낸 개막작 ‘세멜레 워크’ 의상들

‘세멜레 워크’는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파격이었다. 푸르고 노란 머리카락을 한껏 부풀린 펑크족들이 현악기들을 들고 런웨이로 걸어 나왔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테오르보(류트를 개량한 바로크시대 현악기)를 질질 끌며 등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펑크 패션의 여왕’이 손을 댄 흔적이 역력했다. 80분 공연에서 웨스트우드의 최신 컬렉션 두 벌을 포함해 300여 벌의 드레스가 선보였다. 화려하면서도 전위적인 웨스트우드의 드레스를 입은 전문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는 사이에 성악가는 갈망과 탐욕을 노래하고 연기했다.

이번 공연에 나온 의상들은 모두 웨스트우드의 아카이브에서 골라냈다. 웨스트우드는 공연팀이 의상을 의뢰했을 때 별도 제작보다는 기존 컬렉션들을 떠올렸다. 이미 17~18세기 복식사에 기반한 쇼를 수차례 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란을 일으키는 역엔 넉넉한 실루엣, 말하자면 바로크풍 디자인과 컬러로 만든 옷을 뽑아내면 무리가 없었죠. 물론 소프라노나 카운트테너의 경우 움직일 때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가장 크게 고려했어요.”

그는 헤어와 메이크업에도 의상만큼 신경을 썼다. 비비언 웨스트우드의 오트 쿠튀르 라인인 골드 라벨쇼 ‘+5도(+5 degrees)’에서 영향을 받았다. 기후변화를 컨셉트로 삼아 불꽃 느낌의 헤어 스타일과 재를 뿌린 듯한 메이크업을 선보였다. 그는 이 두 가지가 공연 내용과 아주 잘 어울렸다고 평했다. “원작의 본래 테마는 ‘일촉즉발의 세상(Worlds Unleashed)’이에요. 세상의 중심을 잃은 상태, 그러니까 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나 닮아 있죠.”

그는 “첨단 기술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현대인의 집착을 그린 작품이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설명을 더했다.

『가이아의 복수』읽고 정신 번쩍 들어 환경운동에 열성

“패션을 좋아하지도, 별 관심도 없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미 수차례 이런 말을 반복해 왔다. 디자이너가 된 이유 역시 독특하다. 옷 그 자체보다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패션의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벼룩시장에서 주얼리를 만들어 팔던 웨스트우드. 1965년 그는 맬컴 맥라렌이라는 당대의 멋쟁이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마약·로큰롤·아방가르드에 심취한 그를 통해 반권위적 태도를 갖게 됐고, 1971년 함께 매장을 열고 비주류를 위한 독특한 의상들을 만들어내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회고는 담백했다. “펑크의 시대가 왔을 때도 나는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그저 인권에 관심이 있었고, 여왕이 위선의 상징처럼 보여 이를 비꼬고 싶었죠.”

이후 펑크에서 영역을 넓혀 겉옷 위에 속옷을 입은 듯한 티셔츠, 남미·아프리카 원주민 옷에서 모티브를 얻은 스커트, 영국 왕실의 유산을 섹시하게 바꿔놓는 재킷 등을 끊임없이 선보였다. 웨스트우드에게 패션은 미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보수적 주류사회에 대한 통념을 깨는 도전이었다.
최근에도 그는 폭로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 망명을 찬성하며 정치적 이슈에 목소리를 높였다.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한다. 이유를 물었다.

“몇 년 전 환경운동가인 제임스 러브록이 쓴 『가이아의 복수』를 읽었어요.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전제에선 우리가 과거 200여 년간 내뿜은 탄소 배출량이 엄청난 수준의 사막화를 야기한다는 것이었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는 환경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시급한 줄은 몰랐다고 했다. 21세기가 끝날 때까지 무려 1조 명이 환경 문제로 사망할 것이라는 가설을 믿기 힘들었다는 것. 이후 열대 다우림 조성을 위한 시민단체에 100만 파운드를 기부하고, 컬렉션 때마다 모금운동을 벌였다. 1000파운드짜리 테이블보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멸종은 재미가 없다(No Fun Being Extinct)’라는 캠페인 활동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미들턴에게 옷 그만 사라는 충고로 화제

그는 인터뷰 때마다 옷보다 환경 문제를 더 많이 얘기한다. 옷으로 승부해야 하는 디자이너로서 부담스럽지는 않은 걸까. 답은 확고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는 무엇이라도 해야 해요. 당신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면 왜 내가 주저하지 않는지 알게 될 텐데요.”

그러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노동자를 황폐화시키고 있음을 주지시켰다. 패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을 진짜 우아하고 독특하게 보일 수 있는 옷을 고르세요. 표준화되고 대량생산된 옷을 끊임없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죠. 우리는 양보다 질에 집중해야 해요. ‘덜 사고, 잘 고르고, 오래 입으라(buy less, choose well, make it last)’는 게 제 모토예요.”

그는 얼마 전 영국 왕세손비인 케이트 미들턴에게 옷을 덜 사라며 충고를 하기도 했다. “어떤 기자가 미들턴에게 조언할 게 없느냐고 묻더라고요. 나는 그가 같은 옷을 계속해 입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환경운동에 좋은 메시지를 주는 방법이니까요. 미들턴뿐 아니라 사람들은 최신의 것을 가지는 것에 너무 많은 관심을 쏟죠.”

그는 오히려 과거, 오래된 것에 가치를 두라고 했다. 그 누구도 전통이 없는 진공상태에선 아무것도 창조해 낼 수 없다는 얘기였다.

여느 디자이너와 달리 그가 영감을 얻는 곳도 잡지나 컬렉션이 아닌 고전 서적이었다. “가령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를 읽다 보면 과거의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방식들을 연구하게 되고,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최고의 책은 18세기 중국 고전문학을 꼽았다. “차오쉐친(曹雪芹)의『금옥양연홍루몽(金玉良緣紅樓夢)』은 인간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미 황혼을 넘어선 그의 인생에서 추구하는 일을 물었을 때도 답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내 생애 10년이 더 주어진다면 중국어를 공부해 보고 싶어요. 물론 서예도 익혀보고 싶고요. 우주의 비밀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글 이도은 기자 사진 비비언 웨스트우드, 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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