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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 수교 소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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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 대통령 방독으로 더욱 굳혀진 유대>
한독 양국의 전통적인 친선관계는 64년 말 박 대통령의 역사적 방독을 계기로 절정에 달했으며 이를 전후하여 양 국민간의 유대도 더욱 굳어져 현재 재 독 유학생과 기술공이 5백31명, 1천여명의 광부, 약 3백명의 간호원이 파견되어 있다. 이번 「뤼프케」 독일 대통령의 방한으로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의 유대가 더욱 긴밀해질 것이다.
한·독 양국의 교류는 1870년 동경주재 대리공사 「폰·브란트」가 내한하여 통상을 교섭한 것이 시초다. 그 이전에 「오펠트」라는 괴상한 「프러시아」의 상인이 충남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는 대원군의 양부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대원군의 배외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란트」의 첫 번 교섭은 실패했다. 그는 그 후에도 수교에 꾸준히 힘써 1883년 전권 대신 조영하와 한·독 수호통상조약을 조인했다.

<침략에 뒤늦었던 84년대의 독일>
제국주의 침략경쟁에서 뒤늦게 출발한 독일은 극동지역에서 큰 이권을 차지하지 못했고 한국의 정치에도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884년 8월에 착임한 총영사 「젬브쉬」가 한국의 중립화를 주장한 것도 독일이 직접적으로 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883년에는 조폐시설도 도입>
1883년부터 85년까지 조선의 외무협변으로 있던 독일인 「폰·뮐렌돌프」는 대서양 외교정책수립에 큰 역할을 했고 국내정치에도 영향력이 컸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조폐시설을 도입했다. 98년에는 「프란츠·에카르트」가 내한하여 처음으로 서양음악을 한국에 보급시켰다.

<한국동란 당시는 부산에 야전병원>
한국전쟁 때 독일은 부산에 야전병원을 세웠고 4만7천불을 우리나라에 원조했다. 55년 12월 1일 한·독 양국은 상호 국가승인을 했다. 57년 3월 한·독 양국은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키고 58년 8월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켜 독일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방의 하나로 되었다.
우리와 독일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면보다는 종교 문화적인 면이 훨씬 큰 중요성을 가져왔다. 1909년 천주교 「베네딕트」 수도원이 원산에 세워져 문화교류가 시작됐다. 일제시대에는 일본학계를 통해 들어온 독일 학문이 한국에도 풍미했다. 특히 철학·정치학·법학·신학 등 분야에 독일학문의 영향은 막대하다. 「뤼프케」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세워질 「괴테」학원은 독일문화를 직수입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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