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인격살인 도구가 된 출처불명 ‘성접대 리스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정강현
사회부문 기자

“A씨 얘기 알지? 이 양반도 성접대 받았다며? 동영상이 있다던데….”

 지난 주말에 만난 한 지인은 기자에게 전직 고위 공무원 A씨를 언급했다. 지인은 성접대 의혹 사건을 취재하는 경찰청 출입기자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않느냐는 투였다. 물론 기자도 A씨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경찰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속칭 ‘성접대 리스트’에 A씨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는 정도다.

 그런데 취재 기자도 아니고 경찰 관계자도 아닌 사람이 어디에서 A씨 이름을 들었는지 궁금했다. 지인은 “카카오톡으로 누가 보내준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수사 관계자에게 물어봤다. 이 관계자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A씨? 그분 이름이 왜 나오죠? 전혀 관계 없는데….”

 현재로선 성접대 의혹사건에 A씨의 이름이 거론될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A씨를 비롯한 유력 인사들의 실명이 적힌 출처 불명의 ‘성접대 리스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카카오톡·인터넷 등에 무차별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한 인터넷 블로그에는 유력 인사 10명의 실명이 적힌 ‘성접대 의혹 인사들’이란 제목의 글이 26일 현재도 그대로 공개돼 있다.

 인터넷과 SNS의 특성상 근거 없는 소문은 점차 살을 붙이면서 부풀려졌다. 급기야 A씨의 성접대 동영상이 있다는 말도 떠돌았다. 중앙일보 취재진은 A씨에게 직접 해명을 들었다. A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별장에서 성접대를 했다는 윤모씨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실체도 불분명한 ‘성접대 리스트’라는 건 대체 어디에서 만든 것일까. 추측하건대 사정기관과 대기업의 정보라인에서 작성된 명단이 외부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은 현직 법무차관이 연루된 의혹을 받으면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윤씨가 사회 지도층을 상대로 성접대를 한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온 나라가 휘청일 만큼 파괴력이 큰 사안이다. 그런 만큼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은 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썼어야 했다.

 일반인들도 출처가 불분명한 리스트를 퍼나르는 무책임한 행위를 당장 멈춰야 한다. 이는 정보통신망법 위반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인격과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인격살인’ 행위다.

 A씨는 “길거리를 걸어가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인격살인을 당한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근거 없는 소문이 사실처럼 퍼져나가는 세상을 방치한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인격 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정 강 현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