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코노미스트]재벌과 정치자금/권력과 돈의 밀월관계 변천사

중앙일보

입력

외국인 주주들의 감시, '부패 게이트' 여파…당선 유력인사 드러날 때 ‘줄대기’ 본격화할 듯 클린턴 전 미대통령과 섹스추문을 일으켰던 르윈스키가 백악관 인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가족의 한 친구가 민주당에 33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기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국에서 정치자금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실증하는 하나의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진승현·윤태식 로비의혹에 이어 이용호 사건에 대통령 아들·처조카 등 친인척과 청와대 수석들이 줄줄이 연루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비자금과 관련한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대검이 당초 이용호 사건을 수사하면서 김대통령 처조카인 이형택씨의 계좌추적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DJ ‘비자금 관리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한나라당 측 주장이다.

우리 국민이 역대정권을 거치면서 숱한 부패 사례들을 보아왔는데도 현정권의 비리에 더욱 분노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어느 하나 부정부패의 악취를 풍기지 않고 온전하게 정권을 마무리한 대통령이 없지만, 국민은 현정권의 비리실상에 허탈감마저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현정권 측에서는 과거 수천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이 조성됐던 사례에 비하면 지금은 그렇게 큰 비리가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와 세상이 많이 달라진데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정부-재계의 관계는 근대화와 경제개발의 한 수단으로 정부가 재벌을 계획적으로 키웠기 때문에 현재 비리와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박대통령 당시 정부는 주로 수출산업·중화학·사회간접자본을 중심으로 각 기업을 외자도입 금융지원을 해가며 육성시켰고, 그 기업으로부터 거의 공개적으로 ‘성금’ 형식의 자금을 받았다. 반면 전·노 대통령은 박대통령 시절 크게 성장한 재벌들로부터 특혜와 견제를 무기로 조세 형식의 자금을 ‘수금’한 것으로 볼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금융실명제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으나, 측근·친인척 비리의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현정권의 비리현상은 DJ 측근·친인척의 이권개입과 수뢰·핵심기관의 권력남용 등의 형태로 계속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언제 불법 정치자금과 관련한 대형 지뢰밭이 터질지 불안한 상태이다. 특히 국민들은 대통령 친인척과 핵심참모들이 청와대·국정원·검찰·경찰 등 핵심기관들을 총동원해 이권을 챙기려 한 데 분노하고 있다.

그렇게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농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살인자 기업인의 로비에 대한 권력기관의 비호 및 수뢰현상과 관련, 일각에서는 사회적 아노미 현상마저 우려하고 있다. 권력기관들의 연루는 일종의 체제마비 현상으로 이어지고, 결국 국가 리더십의 부재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개발 주역이 돼야 할 일부 벤처기업의 젊은 사업가들이 기술개발과 아이디어 창안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전천후 로비와 주가조작을 통해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개탄도 나오고 있다. 그러한 비리가 자리잡도록 빈틈을 허용한 정부정책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는 더욱 크다. 과거 재벌식 경제개발의 한계에 대한 대안(代案)경제로서 벤처기업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이들 중 일부는 권력실세에 줄을 대고 돈을 빼내 나누어 먹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러한 로비와 줄대기는 주로 지연·학연을 중심으로 잘못 짜여진 국가 중추권력기관의 핵심 라인업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단순한 비리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국가기관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동향사람들이 끼리끼리 집행기관이나 감독기관에 모두 포진하고 있어 견제나 감찰 기능은 철저히 마비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일련의 도덕성·가치관 파괴와 국가 시스템의 혼돈현상을 지켜본 각계 인사들은 더이상 좌시해서는 안 되며, 부패비리 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금년은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있어 선거철만 되면 장마 후 독버섯처럼 솟아나기 쉬운 검은돈 거래현상이 횡행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정치권 재계 공직자 국민 모두가 부패척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행히 최근 비리부패가 초점으로 등장하면서 돈줄을 쥐고 있는 기업쪽에서 아주 몸조심하는 모습이다.

특히 대기업 측에서는 과거 관행이었던 ‘성금’이든 ‘비자금’이든 큰돈을 건네는 일을 극히 꺼리고 있다. 주요기업 대표들이 최근 모임에서 “주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불법적인 정치자금 제공을 일절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부패고리 차단을 위한 움직임 중 하나이다.

대선에 나서려는 여야 유력 주자들이 예비선거전을 앞두고 기업에 자금지원을 타진하고 있으나, 특히 대기업일수록 선뜻 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모 유력 주자의 경우 측근을 통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총수 측에 면담을 요청했으나, 정중하게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주자는 잘 아는 고교후배 대기업에 자금지원을 요청했으나, ‘여러 가지 분위기상 어렵다’는 반응을 접했다고 한 의원이 전했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됐던 김우중·최원석·정태수 회장이 몰락한 사례라든지 진로 장진호·대림 이준용·동아 김준기·삼성 이건희 회장 등이 노씨 비자금 관련 유죄 판결로 아직까지도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실을 잘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재계인사는 “유죄판결 이후 전과조회 때문에 미국비자 하나 받는데도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외국 국가원수 면담 신청시 전과 문의를 해와 창피를 당하고 있는데 쉽게 돈을 내놓겠느냐”고 말했다.

모 대기업 총수의 경우 그동안에는 측근 계열사 회장을 통해 거부하기 어려운 청탁에 성의표시를 해왔으나, 최근에는 경조사나 공익 공개행사에만 지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 재벌인 Z그룹도 계열사 사장 차원에서는 일체 정치자금 지원을 못하도록 하고, 다만 국회의원 후원회에는 개인차원에서 1백만∼2백만원씩 내놓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것도 영수증을 철저히 챙기고 있다는 것. 대기업의 정치자금 기피현상은 최근 삼성전자에 대한 소액주주 배상소송 판결 이후 두드러지고 있다.

수원지법은 삼성이사들에게 9백억원을 배상토록 판결함과 동시에 이건희 회장은 노태우씨에게 비자금을 제공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면서 75억원을 배상토록 판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대기업들이 한국 기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국 참여지분이 크게 늘고 있어 비자금 제공이 쉽지 않다는 것.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는 외국인 임원이 탄생했고, 쌍용시멘트에는 일본 측 경영인들이 상주하면서 자금과 회계관리를 공동으로 하고 있어 돈 빼내기가 어렵다고 회사관계자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 측에서는 거액자금 요청보다는 주로 소속의원이나 당 관련 측근인사들과 일부 학연을 통한 지원에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 이인제 고문의 경우 대기업보다는 일반 기업들의 십시일반에 기대하면서 참석자 1인당 1백만원 이상씩 모금하는 저녁식사 형식의 비공식 후원회를 잇따라 갖고 있다.

물론 대선일이 가까워지고 당선유력 인사가 드러나면 상황이 급전돼 일부 대기업이 거액의 자금지원에 나설 가능성이 없지 않다. 재계의 한 고위인사는 “대선에는 수천억원의 선거자금이 소요되는데, 대기업의 지원 없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겠느냐”면서 “아무도 모르게 목돈을 주고받는 기술 개발이 최대과제”라고 실토했다.

이 인사는 “기업 입장에서는 금융과 세금이 가장 무섭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 “정책·관치금융이 왜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국세청장 권한이 왜 막강한지 모르겠느냐”고 반문하며 대선 막바지에는 유력후보에 보험금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실토했다.

출처:이코노미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