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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안정을 쫓는 20대 작가들 - 김치수|시·소설 월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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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즈음 발표된 작품들을 읽으면 20대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문학적 관심의 변화와 분명히 여기에서 기인한 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판독해 낼 수 있다. 평범한 이야기로 30대의 작가들은 6·25동란에 직접 참전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에 의해 심한 정신적 상처를 받았겠지만 20대의 작가들은 전쟁을 겪었으나 그것에 의한 정신적 상처를 별로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전쟁이 끝난지 17년이 지난 오늘, 사회가 그런 대로 전쟁의 혼돈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 사회가 새로운 안정을 지향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사회학적 고찰을 해보아야 알겠지만 - 20대의 한국인은 전쟁의 「이미지」를 기억하려 들지 않으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것이 좋은 경향이든 나쁜 경향이든 간에 새로운 경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쇼리·킴」이나 「오발탄」같은 작품을 쓰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은 김승옥이나 이청준에게서 좋은 예를 볼 수 있지만 최근에 발표된 새로운 작가들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전쟁의 의미나 사회구조의 개혁에 대해서 천착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에 어떤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현실에 밀착해 있지 않고 자기 나름으로 현실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여유를 갖는 듯 하다.
그 가장 뚜렷한 예가 최인호의 「견습환자」이다. 늑막염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쓴 이 소설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계화된 간호원과 의사, 그들은 환자들에게 웃을 줄도 모르고 시간에 맞추어 정확하게 진단하고 정확하게 병을 분석해낸다.
그들은 생활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기계처럼 정확하게 병을 분석해내는 두뇌에 의해서 인간 본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나」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나」가 퇴원하기 전날밤 일병동과 이병동에 있는 문패를 모조리 바꿔놓은 것은 의사들의 『문명을 비웃어주고 싶은 통쾌한 해학(해학)을』느끼기 위한, 병원안에 있는 인간기계들에게서 인간의 체취가 나타나게 하기 위한,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는 마지막 항거였다.
이 소설의 병원은 문명화한 현 사회의 한 축소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주인공의 인간적인 저항이 이틀 날 아침 좌절로써 끝나고 잇는 사실은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이려는 인간의 노력이 좌절됨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일찍이 「발레리」가 경고한 인간 정신의 위기를 말해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려는 주인공의 행위가 사회에서는 어떤 장난꾸러기의 장난으로 취급되고 만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황량한 가정의 삼부자 사이에 있는 미묘한 관계를 그린 이진우의 「생성」도 앞의 작품과 동열의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작자의 너무 조리 있는 배합 때문에 감동을 약화시키고 있다.
벌레 먹는 「플라타너스」의 잎이 해마다 새로 돋아나듯이 주인공의 의지가 현실의 어둠에 의해 좌절되지만 다시 계속되리라는 것을 작자는 암시하고 있다. 「줄기차다」는 「플라타너스」의 생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시지프」적 노력을 반복하는 동안 무수한 좌절이 오고, 그때마다 극복될 것을 암시하고 있지만 너무 관념적이고 기계적인 때문에 감동이 약화된 것이다.
사생아인 남자와 고아인 여자 이야기를 한 이건용의 「석기시대」에서는 살고있는 증거를 남기려는 주인공들의 의지가 사랑에 집약되고 있다. 사생아와 고아 사이에 일어나는 애정의 갈등, 작자는 여기에서 하나의 목적을 향한 의식의 집념을 그리고 있다.
여자는 자신이 고아임을 숨기기 위해 며칠마다 한번씩 관념상의 살인을 자행하고, 남자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이용하여 여자를 자기 속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들이 그들의 의식의 단합을 위해 노력을 지불하는 것은 사랑을 얻음으로써 살아 있음을 보여주려는 주인공의 눈물겨운 집념의 결정체다.
조문진의 「회귀」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은 「나」가 늙어서 죽어 가는 여자의 어머니에게 늙음과 죽음을 확인시킴으로써 보복하는 이야기다. 생명처럼 생각했던 사랑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오직 그것을 보복하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지불하는 것은 「석기시대」와 비슷한 주인공의 집념을 보여준다. 「석기시대」의 주인공이 관념적인 살인을 묵과하고,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죽어가더라도, 둘이서 석기시대의 삶에 들어가더라도 사랑을 얻으려는 사실과, 「회귀」의 주인공이 배신당한 뒤돌아온 여자와 다시 결혼한 사실은 사랑을 얻음으로써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주인공의 집념을 말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20대 시인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성부의 「복수」와 황동규의 「낙법」(이상 문학 1월호)은 현실에 대한 시인의 탐구적 자세를 보여 준다.
외국에 가서 외로워하고 있는 시인의 「낙법」은 조국의 현실을 슬프게 나타내고 있고 「복수」는 십여 년 동안에 한 여자에게서 쾌락과 부정과 죽음을 본 시인의 노래다.
그러나 이 시에서 여자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이 시에서 튀어나오는 「패자」「아시아의 힘」「혁명」이라는 단어는 이 시를 세밀하게 읽는 독자들에게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 대한 20대 시인들의 자세나 삶의 의미에 대한 작가들의 천착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대 작가들의 이와 같은 경향은 우리 문학의 전망을 어느 정도 밝게 하고 있다.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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