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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의 재검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같은 말도 툭하기 다르고 탁하기 다른 법. 본의 아니게 빗나간 말이 부질없는 오해를 사는 수가 있다. 월남에서의 평정계획은 확실히 이런 경우에 속한다.
한서의 「평정해내」의 뜻은 「병난을 평온하게 진정함」, 또는 「적을 진정함」이다. 적대관계가 전제이기 때문에 「베트콩」을 진압하는 데는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뒤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살림을 도와주는 갖가지 사업을 평정이라 일컬을 수는 없다. 한자를 아는 월남의 식자들이 평정이란 용어에 반발하고 있다니, 이해가 간다.
문제는 번역이 잘못된 데 있다. 원어는 「패시피케이션」 즉 유화. 위협으로 평화를 수립하고 확보한다는 뜻. 전쟁상태는 끝났으나 아직 완전한 평화는 이룩하지 못한 동적인 과정을 가리킨다.
식량을 나눠주고 환자를 치료해 주며 다리를 놓는 일에서부터 장기적인 경제 건설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사업이다.
「헬리콥터」로 「정글」과 습지를 마음대로 넘나드는 미군에 대한 반감을 덜하기 위해 아이들을 「헬리콥터」에 실어 학교에 데려다 주고 심지어 바닷가에 실어가서 해수욕까지 시켜주기도 한다. 고되고 힘든 일이기는 하나 적을 상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호주군은 그들대로 딴 명칭을 붙이고 있다. WHAM 계획이 그것. Win Hearts And Minds. 즉 주민의 심금을 울리고 양해를 얻는 사업이다. 우리가 잘못 쓴 평정이란 말의 진수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고쳐 불러야 할까. 「재건」은 남의 주체성에 개입하는 감을 풍길 뿐 더러 전례가 좋지 않다. 미국의 남북전쟁 후에 북부가 남부에 대해 실시한 무자비한 군정을 그 이름으로 불렀으니 말이다. 남부 주민은 그때 당한 혹독한 강압과 횡포를 백년 뒤의 오늘날까지 이를 갈고 대대로 구전하고 있는 것이다. 평정 대신에 우애·봉사 또는 공조 같은 용어를 써 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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