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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제2혁명」의 막다른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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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피로 물든「뉴스」의 홍수 속에서도 중공 문화대혁명의 진상과 전망을 정확히 점칠 수가 없다. 모택동의 주류파로 중공의 제4인자의 자리를 굳혀 오던 당 선전부장 도주가 하루 아침에 반모파로 몰리더니 남경을 중심으로 해서 모택동 일파에게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번에는 다른 사람 아닌 임표의 직계로서 문화대혁명 추진의 중심인물로 각광을 받던 중공군 정치부 부주임 류지견이 반모·비주류로 몰려 홍위병들의 험구의 화살을 맞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홍위병들과 노동자·농민들의 유혈 충돌의 물결은 요원의 불길처럼 대도시들 중심으로 중공 천지에 확대되어 간다.
이와 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게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비주류파의 반격과 류지견의 전향이다.
남경이 모택동의 홍위병운동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손에 장악되고, 도주자신이 지휘하는 40만 내지 50만의 비주류 홍위병들이 남경으로 진격중이라는 보도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대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혈 충돌 사건들은 중공의 노동자, 농민들이 홍위병 난동에 반발하여 적절한 선동 여하에 따라서는 반모 전열에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류지견의 전향은 군부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참모총장 나서경의 실각과 함께 58년 국방상 팽덕회 숙청 이래의 군부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택동·임표의 주류파와 유소기·등소평의 비주류 권력파는 군과 노동자·농민, 따라서 「중공 그 자체」를 양분해 가지고 혈투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수상 주은래의 태도와 역할이다. 주 자신이 한 두번 홍위병의 벽보공격을 받은 바 있지만 그에 대한 모택동의 신임과 비호는 여전한 것 같다.
그러나 주는 양파 사이에서 때로는 초연한 입장을 취하면서 류소기 일파에 대한 홍위병들의 지나친 공격을 견제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는 주의 중재역 같은 것이 예상되기도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문화대혁명과 그로 인한 양파의 대결은 중재 따위의 상식적인 선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예의 주은래도 자신의 보신이외엔 맡은바 대역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열쇠는 군의 손에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이 나온다. 군은 천하를 휩쓰는 북새통 속에서 초연한 입장과 침묵을 지켜왔다. 그것은 모택동의 치밀한 타산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군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숙청하고 그들에게 합세한 노동자들을 탄압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군과 노동자의 전면 대결이 불가피 할는지도 모른다.
군과 노동자·농민의 대결은 모택동의 혁명 철학이 용납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군이 모·임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팽덕회가 지난 가을 새삼스럽게 체포된 것은 그의 세력이 남아 있음을 뜻한다. 나서경 숙청으로 군은 동요되고 류지견의 주류파 이탈로 2백50만 중공군의 지휘계통은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류소기의 권력파는 전국의 행정과 생산의 실권을 쥐고 있고 58년 대약진 사회주의 노선 및 인민공사의 삼면 홍기 운동에 반발한 노동자·농민들은 상해를 중심으로 벌써 「사보타지」를 벌이고 있다. 변경은 변경대로 중공의 권력이 제대로 못 미치고 있다.
57년 인민공사를 후퇴시켜 류소기의 권력파에 득세의 호기를 허용한 모택동이 자기의 생존 중에 농촌의 자본주의 요소를 뿌리뽑고 전국적인 사회주의 재교육을 위해 제2의 혁명으로서 홍위병들을 앞세우고 문화대혁명을 벌였지만 그것은 마침내 내란의 위기를 몰고 온 것이다.
외신 보도들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고려하면 전면 내란까지는 악화되지 않더라도 모택동이 「치국평천하」의 운명을 걸고 있는 홍위병 운동으로 인한 양파의 대결이 장기화 할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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