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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연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연안시대, 모택동의 「로맨스」는 널리 알려지고 있다. 모는 당시 「마르크스·레닌」학원의 교수였다. 그보다 20세나 젊은 강청은 그 학원의 여학생. 그는 자주 모를 찾아가 무엇을 열심히 묻고, 모는 그때부터 그의 교조를 이 여학생에게 강의했다. 모는 이미 그때 강청에게 홀려 그의 문전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들 사제관계는 결국 연애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모는 세 번째 처를 버리고 강청을 아내로 맞았다. 그후 거의 20여년간이나 강청은 모의 궁전에서 두문불출했다.
「산동성인. 1913년생. 제남고등학교졸. 상해 연극계에 발을 들여 놓음. 1930년 상해의 배연안행. 「마르크스·레닌」학원에 입학. 39년 모택동과 결혼. 연안의 어신 예술학원의 교수. 64년 9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산동성 대표로 선출.」
「현대 중국인명사전」에서나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강청이 처음으로 군중앞에 나선 것은 62년 10월 「수카르노」의 제2부인이 국경절에 중공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때 그의 모습은 맵시 있고 깨끗하고 약간 나약해 보이는, 여배우의 티마저 보이는 미모를 갖고있었다고 한다. 그가 난데없이 작년 8월 살벌한 군복을 입고 천안문에 출현했다. 중공의 국회에 상당하는 전국 인민대표 대회의 대표이긴 했지만 그처럼 전투적인 태세로 군림하지는 않았었다.
왕년의 우아한 배우 강청양이 천안문에 군복을 입은, 그야말로 괴한의 모습으로 나타나 문화대혁명을 부르짖는 것은 아무리 그의 전력이 배우이긴 하지만 연극조다. 문화혁명소조 제1 부조장 역을 맡고 있는 그가 최근 모의 후계자라는 설마저 나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천안문에 나타난 것은 「징용」이라는 말에나 적합할지, 후계자를 위한 포석은 아닌 것 같다. 「정권혁명」을 위해 「문화혁명」이라는 각본이 마련되었고, 바로 그 각본에 맞는 배우가 강청이 아닐까? 아무튼 그 「문화혁명」이 바로 「정권혁명」을 위한 포석이었음이 이제 드러나고 있다. 문화혁명이 살육의 경지에까지 접어들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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