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사랑 듬뿍 알찬 평론서 나와

중앙일보

입력

기자가 쓴 만화 비평서나 철학자가 분석한 애니메이션 평론서가 좋은 반응을 얻었던 적이 있다. 색다른 시각과 분석이 독자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준 덕분이 아닐까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씨와 만화 평론가로 자리를 굳힌 박인하씨가 각각 비평서를 냈다. 『만화당 인생』(마음산책.8천5백원) 과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시공사.9천원) 가 그것이다.

『56억7천만년의 고독』 등 세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을 내고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며 바쁘게 지내는 함씨가 시간을 쪼개 만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우선 반갑다. 그가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나 심갑진의 '오아시스'에 보여주는 애틋한 애정 고백은 입가에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일본의 전통사원 료안지의 정원에서 무라카미 모토카의 '龍(용) '이 주는 미학의 실마리를 찾아낸다거나, 봉덕사 선종의 비천상과 스메라기 나츠키의 '화정곡'이 보여주는 공통점을 추출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관심이 건축.디자인.미술.만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5년 스포츠지 신춘문예 만화평론 당선 이래 지금까지 꾸준하고 열정적인 글쓰기로 관심을 모은 박인하씨는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즐기는 만화와 쓴 글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고 털어놓으며 혼자 즐기던 보다 내밀한 생각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는 순정만화 전문가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흔쾌히 버리고, 대신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즐겁게 토론하던 주제별 분석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잡아간다.

순정만화의 대척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귀신과 공포.퇴마.폭력 등에서 박씨는 만화의 특징 중 하나인 '금기'로부터의 해방을 읽어낸다.

아직도 끝나지않은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를 얘기하는 박씨의 목소리는 높다. 부록처럼 달린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참관기나 일본 세이카대 만화학과 탐방기는 한국 만화의 좌표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에게는 만화 보기를 죄악시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있었다. 박씨는 "만화책을 다른 책들과 똑같이 대접해주셨던 아버지 때문에 만화평론가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함씨 역시 "술에 취해서 들어온 날 집에 만화가 없으면 늘 나를 시켜 만화를 빌려오게 하셨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아버지의 만화 사랑은 즐거운 어린시절과 쉽게 오버랩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