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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문화파워 공연장 누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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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1세기 한국 여성의 현주소는 더 이상 가정이 아니다. 가사노동의 바쁜 와중에도 주부들은 나를 찾겠다며 문화센터로, 자원봉사 현장으로 분주히 발길을 움직인다.

여성에겐 벽이 높았던 법조.의료계 등에도 바야흐로 '여성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중앙일보는 매주 월요일, 급변하는 한국 여성들의 삶의 현장을 구석구석 찾아가는 '여성 리포트'면를 신설한다.

#미사리 서태지의 '빨간봉 부대'

지난 24일 오후 8시 서울 서초동의 한 라이브 카페. 남편이 퇴근할 시간인데도 30~40대 주부들이 카페로 들어선다. 4백여석이 한 시간 만에 얼추 찼다. 요즘 수도권 카페에서 아줌마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 박강성씨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강성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배정애(37.서울 응암동)씨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배씨는 사업상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일주일에 한 두번꼴로 집에 오는 남편을 기다리다 우울증에 빠졌다. 술을 마셔야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술을 줄이고 생활의 활력을 찾았다"고 했다.

박씨가 마이크를 잡고 '장난감 병정' 등의 노래를 부르자 함성이 터진다. 댄스 가수의 소녀 팬 못지 않은 열정이다. 공연이 끝나자 수십명의 아줌마가 사인을 받기 위해 동시에 무대로 몰려 간다. 무턱대고 껴안는 극성팬도 있다.

가수 박씨는 아줌마의 문화 갈증이 만들어낸 스타다. 1982년 한 가요제를 통해 데뷔한 그는 줄곧 무명가수의 설움을 겪었다. 이른바 '뜨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카페촌 무대에 서면서부터다.

30~40대 주부들 사이에 "절절한 노래가 심금을 울린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의 무대는 70석 규모에서 4백석으로 커졌다. '미사리의 서태지'란 별명도 얻었다.

2년 전 12명의 아줌마 팬이 만든 그의 인터넷 팬클럽은 현재 3천5백여명으로 회원이 늘었다. 이 중 3백여명은 박씨가 전국 어디로 공연을 가든 따라다니는 친위대다. 붉은색 교통정리용 막대봉을 휘두르며 열광해 '빨간봉 부대'라 불린다.

팬클럽 회장 정봉순(48.경기도 수원시)씨는 "빨간봉 부대원 중에는 남편의 귀가 시간이 늦은 사람이 많아 팬클럽 활동을 통해 외로움을 푼다"고 전했다.

회원들은 "몰두할 대상이 생기면서 삶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항상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는 이정윤(43.서울 광장동)씨는 모임을 시작한 뒤 처녀 시절 전공을 살려 미술학원 강사직에 도전할 용기를 얻었다.

#소녀의 추억… 소녀의 감성

윤혜원(54.서울 도봉동)씨는 요즘 가슴이 설렌다.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63)가 오는 3월 34년 만에 내한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여중생이던 1965년 친구들과 국내 최초로 팬클럽을 만들었던 그는 당시의 회원 10여명과 함께 2년 전 다시 모임을 결성했다.

"남편이 퇴직하고 애들이 결혼할 때가 돼서 좀 한가해지니 지나온 세월이 아쉽고 그리워졌지요."

지난해 5월 팬클럽 홈페이지를 열자마자 회원이 5백여명으로 늘었다. 팬클럽 회장 권명문(53.서울 보문동)씨는 "컴맹이 많은 세대인데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이 올 줄 몰랐다"며 "주부들이 자신을 위한 문화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 절감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이 성사되기 까지에는 이들의 힘이 컸다. 회원들은 재결성 후 지금껏 40여차례에 걸쳐 리처드의 영국 사무실에 '한국에 다시 와달라'는 편지를 띄웠다.

공연을 추진한 엑세스 엔터테인먼트 노민호(38)기획실장은 "자신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만들려는 아주머니들의 열정에 놀랐다"고 말했다.

반면 10대 중심의 대중문화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있다. 의사.교사 등 30~40대 전문직 주부 20여명이 만든 'god는 30대가 지킨다'가 그렇다.

모임 리더인 중학교 교사 홍민숙(45.서울 신림동)씨는 최근 6개월간 그룹 god의 콘서트에 40여차례나 다녀왔다.올해 고교에 들어가는 딸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문화 소비자에서 문화 주체로

연극배우 박정자(61)씨의 후원회인 '꽃봉지회'는 주부들이 직접 문화의 주체로 나선 경우다. 91년 결성된 모임의 회원은 현재 2백50여명. 연극계 인사 등 전문직도 있지만 중추는 역시 60%가 넘는 평범한 가정주부들이다.

회원들은 후원금을 모아 96년부터 연극계의 '올해의 배우'를 뽑아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 초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1억원의 기부금을 내놓았다. 초대 회장을 지낸 한현숙(49.서울 논현동)씨는 "꽃봉지회는 특정 배우가 아닌 연극이라는 문화 장르에 대한 팬클럽"이라며 "약간의 용기만 내면 주부들도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odinelec@joongang.co.kr

<사진 설명 전문>
‘미사리의 서태지’라 불리는 가수 박강성(中)씨의 서울 서초동 라이브 카페 공연장에 아줌마 팬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팬클럽 활동을 통해 몰두할 대상이 생긴 뒤 삶이 밝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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