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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26) 부친은 야당 국회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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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6년 10월 고형곤 당시 민정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미 간 군대 지위 협정(지금의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 SOFA)’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고 의원은 야당 정치인 중에서도 강경파로 꼽혔다. 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다. [중앙포토]

1961년 12월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입영 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장이 나오면 군대를 다녀온 다음 발령을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각 사무처에서 통지문이 왔다. 공무원 임용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통지문을 들고 중앙청 인사과로 찾아갔다.

 “입영 영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무원 임용 신청을 등록해야 하나요. 아니면 군대를 갔다 와서 등록해야 합니까.”

 인사과 담당 직원이 답했다.

 “입영을 기피한 사실이 없으면 지금 임용 후보자로 등록하세요.”

 그래서 공무원 임용 후보자로 등록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있고 군사정권이 들어선 때였다. 병역을 기피했거나 다른 병역 문제가 있었다면 공무원으로 임용되지 못했을 거다. 병역을 기피한 사실이 없는 다른 고시 합격자들과 함께 62년 2월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발령이 났다. 원했던 내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공직을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야당 정치를 시작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수습 행정사무관이었던 63년 2월 말 일요일 서울중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지금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자리다. 5·16 군사 쿠데타 후 야권이 주최하는 첫 번째 민간 정치 집회가 열렸다.

 연사는 이인 전 제헌의원과 아버지인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이었다. 연설이 무르익자 L-19 비행기가 공중을 선회했다. 비행음 사이에서 아버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의(飜意·먹었던 마음을 바꿈)의 번의는 무엇입니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민정 선거에 불참하겠다고 해놓고 번복한 사실을 겨냥한 연설이었다. 아버지가 했던 연설은 다음날 신문 제목으로 고스란히 실렸다. 내가 연설장에 왔다 간 것을 아버지는 몰랐다. 인파 뒤에 서서 저 멀리 아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아버지는 민정당(民政黨) 후보로 군산·옥구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정당에서 핵심 인사로 일했다. 정책위 의장과 사무총장을 지냈다.

 아버지가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고난이 닥쳤다.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내무부 지방국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꿈에 부풀었다. 1년6개월이 지나면 수습 꼬리표를 떼고 보직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동기들은 군수로도 나가고 각 부처의 계장(지금의 팀장) 자리를 받았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1년이, 2년이 지나도 나에겐 보직이 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강경 중에서도 강경으로 꼽히는 야당 의원을 아버지로 뒀다는 까닭에서였다. 상공부 상역국장이었던 형 고석윤은 63년 결국 공직을 그만둬야 했다. 국장인 형뿐만 아니라 말단 행정사무관인 나에게도 정치권의 서슬 퍼런 입김이 끼쳤다. 그 시절은 그랬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이인

이인(李仁·1896~1979)=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 일제 강점기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3년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법정에 선 독립운동가를 무료로 변호했 다. 광복 후인 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됐고 그해 제헌의원으로 당선됐다. 61년 5·16 이후 야당 원로로 활동했다. 정부로부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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