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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종교성과 기독교의 토착화|다가온 성탄절을 계기로|윤성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시끄러운「크리스머스」가 다가왔다. 기독교신자 아닌 사람이 공연히 들떠서 법석을 떨고 난장판 치는 것이 연중행사의 하나로 돼버렸다. 우리의「명절」로 되어가는 「크리스머스」를
맞아 한국인의 종교성과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를 신학자 윤성범 박사(감리교 신학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편집자주>
한국의 신관념은 유태인의「야웨」의 신과 같이 유일무이한 신이다. 한국의 하느님사상은 원시 유일신론의 하나의 정형 적인 본보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신관념이 삼위일체 신론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곧 고신도의 전통 속에서 자라온 단군신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중국에도 일본에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신관념이다.
한국인은 모든 생활양식에서 종교적인 특색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한국민족은 종교적인 이념을 그들의 정치생활에 그대로 투사했다는 점에서 특히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불교는 신라시대의 정치적인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신라의 불교는 정치에 그대로 투영되었고 불교생활은 곧 정치생활로 바로 연역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신라시대의 불교뿐 아니라, 이조시대의 유교만능시대에도 사정이 같았다. 이조의 유교가 한국인의 정치생활에 직접 관여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사실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조시대에 있어 유교가 한국인의 골수에까지 사무치고 정치이념의 권화로 등장하기까지 된 것은 한국민족이 원래 종교적이기 때문에 무엇이나 종교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이것을 정치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민족심리에 기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진리의 종교라면 이 종교가 단순히 사람의 영혼만 구원하는데서 그쳐서는 안되며 국가와 사회를 향상시킬 수 있는「무엇」이 있어야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와 사회를 개변시킬 힘이 없는 종교는 맛을 잃은 소금이요, 존재의의를 상실한 골동품이 된 종교일 것이다. 진정한 종교는 국가사회를 개변시키고 향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이다.
단순히 내세신앙만으로 일관하지 않고 언제나 하늘을 지향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땅에 미련을 두고 무엇을 해보려는 갸륵한 마음씨, 이것이 한국인의 종교성이다. 천당이나 극락세계만 바라고 있는 것은 한국의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종교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중시하고 현실타개를 모색하는 종교라고 해야 좋을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불승들은 나라를 위하여 칼을 들고 싸우지 않았던가.
애국할 줄 모르는 종교는 참된 종교라 할 수 없다. 성서에 나타나는 역대의 인물이 모두 위대한 애국자들이었던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신앙과 애국, 이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라면 서슴지 않고 애국을 택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애국은 곧 신앙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진정 종교적이라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애국적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불교, 이조의 유교는 제각기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정치적인 역할까지 했었다. 아직 시험제로 남아있는 것이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80년 역사로는 기독교의 장래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1∼2천년의 긴 역사를 통해 내려온 불교나 유교에 비하면 기독교는 한국에 있어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에는 아직 불교의 원효대사, 유교의 퇴계 율곡 같은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적인 사상이 기독교를 통해서 아직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한국인과 한국국가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지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기독교도 불교나 유교와 같이 위대한 지도자에 의하여 통솔되고 또 모든 기독교의 진리가 철저하게 한국적인 바탕에서 음미되고 소화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 민족에 복락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에 기독교가 채 소화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비참한 현실을 빚어내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유교나 불교 또는 기독교는 모두다 외래종교라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는 한국사람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종교성에 훌륭히 받아들여졌었다. 이제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의 운명은 그 토착화의 성공여부에 달려있고 토착화는 한국의 고신도 혹은「샤머니즘」에 나타난 종교성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다. <윤성범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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