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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6년-뉴스의 주인공을 찾아서(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저물어 가는 66년-·작년의 격동에 비하면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긴 하지만 사회 각분야는 쉬임 없이 요동했다. 정가는 선거준비-, 여·야당은 정돈을 서둘렀지만 야당 안의 대립은 틀을 다져가기만 했다. 연탄·쌀·「시멘트」파동이며 들썩했지만「존슨」방한 둥 화려한 전시외교로 수도가 붐비기도 했다. 이해의 여울진 사상들을「뉴스·메이커」들에게서 들어본다.
「남은 여생을 서가 속에서 조용히 보내려는 게 당초의「플랜」이었지요. 총장직(고대)을 내놓고 오랜만에 시간을 얻어 장서를 정리하고「록펠러」재단과 계약된 한국정치론을 완성하는 것, 이것이 내 올해 계획이었는데 뜻밖에 정가에 나서고 말았어…』66년은 유씨에게 커다란 선회의 해였다. 34년 동안에 절친 교단생활을 뒤로하고 정치로 방향을 바꾼 첫 걸음이 민중당대통령후보-.
『현실정치를 생각하게 된 계기? 아마 금년 봄이지….박병권씨가 나를 찾아와서 정치얘기를 꺼내더군. 그 자리서야 어떤 일을 구상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무렵 박씨는 조국수호협의회, 예비역장성단의 민중당 합류협상에 앞장서있었고 합류에 성공하면 유씨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는 구상도 갖고있었지만 합류공작의 유산과 더불어 좌절-. 유씨에게 두 번째 노크해온 손님은 민중당 당 지도부.
『10월 중순쯤 대통령후보 교섭을 받고 허정씨와 장준하씨를 만나 민중당 형편도 알아본 뒤 수락하기로 결심을 했어. 이때 학계사람들의 의견도 구했는데 거의 모두가 험악한 정계로 뛰어드는데 반대-l.
하지만 정치의 지적 도덕적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해서 그 지식과 양심을 망가뜨리지 않고 현실정치에 기여하는바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 불안스레 요동하는 세상을 서재 일각에서 응시하고 지내는 것도 비겁한 것 같기도 하고….』
-올해를 지내온 얘기를 좀…생활자세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1주일에 세 번씩 강의에 나가고 학계친구들과 어울리고 부담 없는 홀가분한 생활이었지. 그런데 지명을 받고 교수직마저 사표를 내고 고대를 나올 때는 허전한 마음도 들더군….정계에 나오니까 모든 일. 만나는 사람부터 생소한 느낌이야. 초년생 생활은 조심조심 걸어왔지.』
유씨는 11월부터 지방유세로 첫 선을 보였고 단일후보란 명제에 말려 윤보선 신한당총재를 찾은 일도 있다.
『첫 유세로 광주에 갔을 때 당 간부들은 내 연설이 강의 조 일거라고 조바심하더군. 그래도 청중은 귀를 기울여주고 특히 강연회가 끝나면「사인」해달라고 몰려들던 학생들… 이 기억은 오래 잊혀지지 않을 거야』
-경쟁자가 된 윤보선씨를 만났을 때 특히 느낀 인상은?
『윤씨를 찾아간 건 인사였는데…내 심경을 솔직히 말했지만, 그 얘기는 덮어두어야지…. 』
상대 야당얘기는 말조심 제일주의로 일관했다.
-이 해를 돌이켜 본 소감?『글쎄, 어떤 분야를 보느냐는 건데…정치적인 면에서 야당세력의 정비가 시작되는 해라고 할까. 정비되는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년선거를 치르고 나면 재정비는 반드시 올 것이고‥·그런 터전을 만들어 가는 몸부림을 시작한 셈이지-.』
『나는 야당이 힘을 모아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동안 유세 다니느라고 이 문제는 아무 일도 못했지만 요즘 야당통합문제가 나오고 당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나도 이 일에만은 당의 결정에 대해 간섭도 해야겠어. 어떤 이들은 나도 결국 어느 정당에 이용되고 말 것이라고 하지만 내 양심이 현실정치에 부딪쳐 부서져버린다면 그건 내가 못난 탓이야. 나는 내 스스로를 이렇게 타이르며 이 해를 보내기로 했어…』
민중당기수 유씨의 정치생활 두 달…. 아직은 순조로웠지만 새해부터가 시련기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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