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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고부 갈등에 화병 걸린 30대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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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Q 저는 백화점 기획파트에서 근무 중인 30대 중반 기혼 여성입니다. 작은 일에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기운이 팍 가라앉기도 하고요. 늘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하룻밤에도 여러 번 깨다 보니 하루 일상이 피곤해요. 저는 애 아빠와 대학교 1학년 때 만나서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어요.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할 때 제 집 형편이 어려워서인지 시어머니가 반대하셨습니다. 결혼 후 시집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직장생활 하랴, 시어머니 눈치 보랴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어렵사리 분가를 했습니다. 전보다 편하긴 한데 아직도 시어머니 전화를 받거나,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시어머니 얼굴을 보면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저는 나름대로 시어머니에게 잘 한다고 하는데 좋은 소리 한번 못 듣습니다. 아무리 하소연해도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합니다. 한마디로 “네가 알아서 하라” 식입니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A 화병이라는 게 있죠. 화병은 우리 발음 ‘Hwa-byung’ 그대로 미국 정신과 협회에 문화관련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으로 등록된 스트레스 장애입니다. 문화관련증후군이란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심리적 특성을 반영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화병은 우리나라의 특성을 반영한 장애라는 말입니다. 화병을 앓는 전형적인 주인공은 시집살이하는 며느리입니다. 시집살이의 한(恨)이랄까요. 서운함과 억울함을 표출하지 못해 분노 에너지가 점차 차오르다 보니 속상한 마음이 몸 밖으로 드러나 두통과 소화장애, 심장 두근거림, 수면장애 등의 신체 증상을 두드러지게 겪습니다. “요즘 시집살이가 무슨 시집살이냐, 오히려 우리가 며느리살이 한다”고 어르신들은 말씀하시지만 이른바 ‘씨월드’, 즉 며느리들의 시집살이 고통은 여전합니다. 다만 과거에는 다 알면서도 쉬쉬하는 금기의 콘텐트였지만 이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TV 프로그램에 나와 막말 수준까지 드러내놓고 얘기를 한다는 게 달라진 점이겠죠.

 필자는 한 아침방송에서 ‘바쁘면 내려오지 말거라’라는 주제를 놓고 진행한 토크쇼의 패널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시어머니가 직장생활 하는 바쁜 며느리에게 “명절 때 바쁘면 시집에 굳이 오지 말라”는 공감 멘트를 보낸 겁니다. 문제는 며느리가 이를 곧이곧대로 행하면 씨월드의 미움을 사게 된다는 겁니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소통, 영어로는 literal communication이고, 다른 하나는 맥락을 읽는 소통, 즉 contextual communication입니다. 권력자일수록 맥락 소통을 즐겨 사용합니다. 회사 대표인 ‘씨’이오(CEO)와 씨월드의 대표 ‘씨’어머니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맥락 소통을 즐겨 사용한다는 겁니다.

 회사에 업무적으로 손해를 끼친 김 부장이 있다고 칩시다. CEO의 호출을 받고 혼날 각오를 합니다. 예상 외로 CEO의 첫마디는 “오늘 바빠?”입니다. 김 부장, 오랜만에 친한 친구와 약속이 있습니다. 본인이 회사 사정으로 여러 번 미뤘던 약속이라 오늘 또 미룰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네, 선약 있습니다”란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꾹 참고는 “선약 있습니다만 취소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CEO의 얼굴이 밝아지며 “오늘 거래처 김 사장과 약속 있는데 같이 나가자고. 아, 그리고 김 부장 관련 보고가 올라왔는데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하지 말고.” 김 부장이 “바쁘다”고 대답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야단맞느라 진짜 바빠졌을 겁니다.

 CEO와 시어머니가 맥락 소통을 즐겨 사용하는 심리는 뭘까요. 그간 자신이 조직을 위해 한 희생의 대가를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는 겁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죠.

 “아무리 바빠도 이번 명절에는 꼭 내려와”란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내려온 며느리보단 “바쁘면 내려오지 말거라”고 말해도 “며느리 된 도리상 그럴 수 없다”며 내려온 며느리의 행동이 시어머니에게 훨씬 큰 감성 보상을 줍니다. 직접적인 옆구리 찔러 절 받기는 감동이 적죠. 알아서 해줄 때 감동이 크기 때문입니다. 회사나 가정에서 이런 맥락 소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이나 며느리는 인정받고 승진하기 어렵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누구든 CEO나 시어머니가 되면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하게 됩니다. 시어머니에게 있어 며느리는 가족이라는 조직을 더 번성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데 역할을 담당할 부하 직원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그 조직의 소중한 상품이죠. “나는 너를 딸처럼 생각한다”란 시어머니의 발언은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CEO의 요구와 같습니다. 맥락적으로 해석한다면 “너는 이제 이 조직을 네 조직이라 생각하고 소중한 상품인 네 남편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희생하라. 그리고 이 조직의 지속경영을 위해 차세대 상품인 손주를 생산하라”란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병은 학습효과가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부하직원으로서 경영수업을 받는 며느리는 자식이 커 가면서 CEO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갑니다. 시어머니를 닮아가는 것이죠.

 CEO와 시어머니는 부하 직원의 희생만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도 자신과 조직을 동일시하고 개인적인 감성을 희생합니다. 희생한 만큼 보상심리도 커집니다. 회식은 직원들의 감성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자리여야 합니다. 그러나 설문을 돌려보면 직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상위에 늘 회식이 오릅니다, 회식이 일보다 더 스트레스를 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회식에 참석하는 CEO가 있습니다. 누구보다 바쁘지만 자신이 가서 술 한잔 따라주고 직접 위로해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회식에 참석하는 CEO의 심리에는 자신이 정상에 오를 때까지 고생한 마음을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이 꽉 차 있습니다. 일만 열심히 하는 부하 직원보다 회식에서 CEO의 기분이 좋도록 상황에 맞는 고급 아부를 잘 날리는 직원이 더 사랑받고 승진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이런 사람이 좋은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 일이라는 게 CEO가 믿어 주고 끌어 주어야 잘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에게 있어 명절이나 생일 같은 가족 행사는 회사의 회식과 동일한 겁니다. 명절날 제일 고운 한복을 멋스럽게 차려 입고 계신 시어머니, 며느리는 ‘왜 불편하게 저러고 있나’ 싶겠지만 시어머니 입장은 다릅니다. 자신이 여주인공으로서 그간의 희생을 보상받는 자리이니만큼 최대한 멋을 낸 겁니다. 이때 “어머니, 차례도 다 지냈는데 편하게 갈아입으세요”라고 말하면 며느리는 좋은 말 하고도 미움 받게 되는 거죠. 며느리 힘들다며 혼자 음식 다하고는 식사 마칠 때쯤 “손에 신경통 생겼다” 하시는 시어머니, “어머니 죄송해요, 다음부터 저희가 할게요, 이제 쉬세요”라고 말해 보세요. 시어머니 얼굴이 더 굳어지실 겁니다. 현금 든 흰 봉투가 정답입니다. “어머니 저희 보살피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변변치 않지만 여기, 앞으로도 저희 계속 많이 보살펴 주세요”란 말도 필요하겠죠.

 씨월드의 화병은 소통 장애입니다. 문자소통으로 받아들인 며느리와 맥락소통을 하려 한 시어머니가 마찰을 일으킨 감성의 문제란 얘기입니다. 씨월드의 마찰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게 최선이죠. 한 타이밍 빠른, 희생에 대한 감사가 효율적인 씨월드 대응 전략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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