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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美여대생 피살사건 '안개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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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 영등포구치소에 한달째 독방에 갇힌 파란눈의 금발 미국 처녀가 있다. 2년 전 발생한 '이태원 미국 여대생 살해사건'의 용의자 켄지 노리스 엘리자베스 스나이더(22).

마셜대 초등교육학과 3년생. 범죄인 인도협정에 따라 지난 연말 국내로 송환된 첫 외국인이 바로 그다. 그녀는 다음달 한국에서 열릴 재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한때 미 연방수사국(FBI)에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강하게 결백을 주장한다. 한때의 자백 외에 물증도 목격자도 없는 사건.

한국 재판부는 과연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재판이 다가오면서 미국 언론들의 관심은 더 커지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justice4kenzi.blogspot.com)엔 그녀를 동정하는 미국 네티즌들의 구명운동이 한창이다.

사건은 2001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해자는 피츠버그대 3년 제이미 린 페니시(당시 22세.문화인류학).

페니시는 3월 18일 오전 서울 이태원의 한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얼굴.목.가슴 등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코와 입이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스나이더와 함께 계명대 교환학생으로 입학한 지 2주 만이다.

숨지기 전날 페니시는 서양 축제일인 '성 패트릭의 날'(3월 17일)을 맞아 스나이더 등 동료 교환학생 6명과 이태원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주한 미군들도 몇명 어울렸다. 오전 2시45분쯤 페니시와 스나이더는 숙소인 K모텔로 돌아왔다. 둘은 서로 다른 방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 페니시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잔 네덜란드인 친구(여)가 싸늘하게 숨져 있는 페니시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그 친구는 술기운에 밤새 곯아떨어져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했다.

◇반전 거듭한 수사=신고를 받은 서울 용산경찰서는 FBI한국지부.미육군범죄수사대(CID)와 공조 수사에 들어갔다.

"술집에서 미군들이 추근거렸다"(스나이더) "군인으로 보이는 외국인 남자가 페니시의 방에서 나오는 걸 봤다"(K모텔 주인)는 등의 진술에 따라 미군병사들이 수사선상에 올랐다. 스나이더는 참고인 자격으로 전후상황을 진술한 뒤 3월 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군병사를 상대로 한 수사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수사 시작 9개월 만에 중요한 단서가 포착됐다. 수사팀이 현장 상황 등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스나이더의 진술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나타난 것이다.

"스나이더는 페니시가 샤워하는 것을 도와준 뒤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잤다고 말했지만 욕실 바닥에는 물기가 전혀 없었다. 또 욕실 문을 닫으면 안팎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점 등 의문점들이 나타났다."(용산경찰서 황운하 형사과장)

이에 따라 FBI와 CID는 지난해 2월 스나이더가 살고 있던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로 수사관을 급파했다. FBI 심리수사요원 등의 사흘에 걸친 추궁에 스나이더는 "내가 죽였다"는 자백을 했다."모텔에 돌아와 페니시의 샤워를 도와주려는데 페니시가 동성애를 시도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어린 시절 오빠 친구로부터 강제 추행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손으로 페니시를 때려 쓰러뜨린 뒤 발로 얼굴 등을 짓밟았다." 스나이더는 곧바로 구속 수감됐다.

한국 법무부는 지난해 4월 미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고, 스나이더는 웨스트 버지니아주 남부연방지법의 결정으로 12월 20일 한국에 송환됐다.

◇"나는 결백"=스나이더는 그러나 첫 자백 이후 "자백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나는 결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2일 찾아간 취재팀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FBI와 CID 수사관 세명이 죽은 친구의 사진을 보여주며 계속 추궁했다.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허위 자백을 한 것이다." 그녀는 "한국 재판부가 내 결백을 밝혀줄 것으로 믿는다"고도 했다.

◇치열한 법정공방 예상=내달 시작될 재판은 치열한 유.무죄 공방이 펼쳐질 전망이다.

그러나 스나이더를 기소한 서울지검 서부지청 형사5부 남명현(南明鉉)검사는 "그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유죄 입증이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와 웨스트 버지니아주 언론들은 사건 직후부터 추적 보도를 하고 있다. 방송에서는 스나이더의 신병 인도를 놓고 열띤 토론도 벌어졌다.

헤럴드 디스패치의 리 아널드 기자는 "이번 재판을 미국 언론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지켜 보고 있다"고 했다. 'O J 심슨'형 판결이 나올 것인가.

취재팀 = 강주안.구희령.김필규 기자jooan@joongang.co.kr

취재협조 = 美 트리뷴 리뷰 드웨인 피켈스 기자dpickels@tribwe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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