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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벤처 이대론 안된다 (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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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솔루션 제공업체인 P사의 金모(37)사장은 자신의 회사가 벤처업체로 지정받지 못한 원인을 '로비력 부족'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지난해 4월 벤처인증기관 심사에서 탈락한 金사장은 얼마 후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선배 정당인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그러자 이 정당인은 "전화 한 통화면 해결될 걸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었다.金사장은 "주위에서 벤처인증을 받은 업체의 사장들이 '미리 손을 썼다'는 말을 듣고 허탈했다"고 말했다.

'모험기업'이라는 뜻을 지닌 '벤처'가 모험정신을 잃고 있다. 기술개발과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할 벤처들이 로비와 머니게임에만 정신이 팔려 각종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철학 없는' 물량위주의 벤처정책이 벤처관련 각종 게이트를 낳고있다고 지적한다.

◇ 모험 대신 로비.머니게임만=소프트웨어업체인 C사는 지난해 중순 금융계 등을 두루 거치면서 정.관계인사 및 언론계 고위간부와 친분이 두텁다고 소문난 Y씨를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Y씨는 회사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외부인사 접촉만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동창회 신드롬을 일으키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한 커뮤니케이션 사이트는 인수대금을 둘러싼 창업자와 인수업체간의 법정분쟁이 복잡하게 얽히며 독보적인 입지마저 흔들리고 있다.

성소미 한국개발연구원(KDI)연구위원은 "벤처 붐을 타고 실제 경영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손쉽게 조달한 뒤 수익성 있는 사업모델을 찾지 못하자 벤처인들이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머니게임에 열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물량 위주의 정책이 문제=전문가들은 한국의 벤처들이 극심한 도덕적 해이를 겪고 있는 데에는 정부의 지나친 정책적 개입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의 대표적 벤처지원 정책이 1998년부터 시작된 '벤처기업 인증 제도'. 일정요건을 갖추면 정부가 벤처로 공식 지정해 세금과 금융에서 각종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벤처인들 사이에서는 '벤처기업 확인증=성공 보증수표'라는 등식이 통하고 있다.

숭실대 유동길(경제통상학부)교수는 "일정한 틀을 만들어 놓고 벤처 여부를 가리는 벤처 인증제도는 벤처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기형적 제도"라며 "당장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벤처인증 제도는 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강력한 벤처육성 의지에서 나왔다.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金大中)대통령 후보는 "벤처기업 육성으로 매년 50만명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발표했었다. 현재 벤처에 대한 정부의 각종 지원자금 명목은 12개 부처에 걸쳐 1백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시장논리를 무시한 인위적 정책은 벤처의 체질을 갈수록 약화시키고 있다. 지난해 조성된 1조원 가량의 벤처 투자액 중 정부 출자분은 30%나 차지했다.

민간 단독출자분은 불과 13%로, 정부의 종잣돈이 없으면 벤처투자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정호 수석연구원은 "정부의 벤처정책이 양적성장 위주로 흘러 벤처 생태계의 자생력이 실종됐다"며 "직접적이고 물량 위주의 육성책보다는 인프라 조성 위주의 정책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상.김창규 기자

*** 선진국에서는…

미국.영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정부가 벤처기업을 정책적으로 적극 지원하지 않는다. 다만 벤처기업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주변환경만 만들어줄 뿐이다. 예컨대 ▶창업분위기 조성▶엔젤 활성화▶정보기술(IT) 인프라 구축▶기술관련 기관육성 등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벤처 스스로 커 나가게 하는 것이다.

산업연구원의 장윤종 실장은 "우리는 기업중심으로 벤처정책을 펴고, 영국.캐나다 등 선진국은 기업을 할 수 있는 환경 중심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게 큰 차이"라며 "우리도 기술 기반이 구축돼 있는지,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등을 고려해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전국 온라인화 5개년 계획인 영국의 'UK온라인'을 비롯해 일본의 'IT 기본전략', 독일의 '인포2000' 등 정보통신 인프라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미국은 정부가 구체적인 투자계획이나 목표를 제시하기보다는 IT기반 구축의 활성화를 위해 일반적 원칙과 방향만 설정하고 있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민간주도로 강력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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