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경제 view &

100세 시대, 금융‘게임의 룰’이 변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황성호
우리투자증권 사장

우리 국민은 ‘100세 시대’라는 말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 말 속에는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과, 더욱 길어진 은퇴 이후 삶에 대한 불안감이 함께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안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산업화 시대의 주역인 베이비부머들은 은퇴 이후 생활을 위해 자영업으로 몰리고 있다. 국민연금을 제외하고 특별한 추가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영업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생계형 창업은 2~3년 안에 90% 이상이 실패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자식을 결혼시키고 한두 번 사업에 실패하면 극빈층으로 떨어지고, 자존감을 상실한 가장들은 큰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자식 세대의 미래는 다를까.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비슷한 전철을 밟거나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 부모 세대와는 달리 집을 통해 부를 늘려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어렵고, 연금마저 고갈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최근 국민연금을 기초연금 재원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둘러싼 세대 간 갈등은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젊은 세대의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다.

 증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해결책일 수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미래 세대에게 짐을 떠넘긴다는 점에서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다. 노후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젊은 시절부터 연금과 다양한 금융상품에 가입하도록 하고, 투자에 대한 이해를 높여 생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00세 시대 금융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금융은 고도화된 금융상품과 솔루션을 제공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연금이 수익성을 높여 국민에게 보다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면 그에 맞는 운용기법과 상품군의 편입이 필수적이고, 금융투자회사들은 고도화된 금융기법으로 만들어진 상품들을 연금에 제공해야 한다.

 한국 금융이 당장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다.

 첫째, 금융을 제조업의 보조 수단으로 여기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금융자산을 잘 활용하는 것 자체가 국민 행복에 기여하는 일이다. 한 글로벌 금융사에 따르면 현재 760조원인 한국의 연금 자산은 2020년 2000조원으로 증가하고, 이를 포함한 가계 금융자산은 4500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 금융자산이 지금보다 1%포인트만 더 수익을 낼 수 있다면 1년에 40조원 넘는 돈이 더 생긴다. 이렇게 창출된 수익은 세대 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복지 부담을 상당히 덜어줄 수 있다.

 둘째, 금융업 수행에 따르는 리스크를 획일적으로 정하고 관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일반 상업은행의 리스크와 금융투자업의 리스크는 철저히 분리해 관리해야 안정성과 수익성의 적절한 균형을 찾을 수 있다. 상업은행의 주 수익원인 예대마진은 직원들의 창의에 의해 급격하게 증대되거나 재창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융투자업은 직원들의 창의가 바로 고객의 수익과 부가가치의 증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금융투자업은 리스크를 감내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능력은 자율적인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습득된다. 위험관리가 어렵다고 규제를 통해 사전에 위험을 없애는 것은 운동선수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셋째, 법과 규정, 즉 게임의 룰을 바꿀 때 시장의 자율과 책임의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면밀하게 따져야 한다. 자율과 책임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시장에서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해지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최고의 성과와 최적의 위험관리가 가능해진다. 보다 공정하고 세밀하게 관리되는 시장에서 훌륭한 플레이어들을 키워야 한다.

 치열하게 연습해 성장하고 싶은 국내 금융 선수들에게 연습 무대조차 마련되지 않은 현실에서, 마땅한 대책 없이 생계를 위해 내몰리고 있는 은퇴 세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엄청나게 늘어날 기관과 국민의 금융자산을 누가, 어떻게 보호하고 키울 수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모두가 수년 안에 다가올 이 엄청난 과업에 준비되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다.

황 성 호 우리투자증권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