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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으로 세상읽기] 명절만 되면 남자로 태어난게 다행스러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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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내가 남자인 게 좋다. 남자라서 겪는 불리함보다 기득권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실용적 명분 때문은 아니다. 화장실 문제 같은 초보적인 이유가 나에겐 더 크다.

남자 화장실은 여자 화장실과 같은 용량일 때도 세 배의 효율을 발휘한다. 여자들이 커다란 칸 안에 들어가야 할 때, 남자들은 덜 수고하고도 짐을 벗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가끔 화장실 앞으로 착하게 늘어선 여자들의 행렬을 보면, 참 불편하겠구나, 싶은 불가항력적 연민이 밀려온다. 거기엔, 생리학적 진실만으로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기쁨도 섞여있지만.

그런데 명절이라는 화두에 이르면 남자라서 좋다는 명제는 좀더 착잡하게 얽힌다. 나는 남자지만, 여자들의 명절 스트레스를 깊이 이해한다.

왜 여자들은 팔다리가 퉁퉁 붓도록 음식을 준비하고도 금방 남자들이 어지른 음식상을 치우고 또 차리느라 종종걸음을 치는지, 왜 남자들은 여자들이 천장까지 쌓이도록 설거지 그릇을 만들어내놓고, 몇 번이나 상을 차리라고 요구하면서도 그토록 당당한 건지. 내 맘 속에선 인간애가 침출수처럼 치솟고, 이건 불공평하다는 대사도 함께 봉기한다.

여자들이 명절 때 치르는 독특한 신경전을 헤아리면 상황은 더 꼬인다. 음식 준비를 위해 여자들이 큰 집에 도착하는 순서에 관한 미묘한 신경전, 차례를 지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때 남은 음식을 싸는 순간의 독특한 줄타기, 그 와중에 큰집을 나서는 마지막 타이밍에 관한 승강이….

평소라면 아무 문제없을 일들이 명절 때마다 시험에 드는 것이다. 하지만 애통함은 순간이다. 난 남자 잔다르크처럼 떨치고 일어나 남자들을 계몽하거나 몸소 여자들의 노동을 대신하기엔, 남자로서의 편리를 누리는 데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내가 소속된 남자들의 방석으로 되돌아가 그들 무리 가운데 자리를 잡게 되면, 짧은 연민의 순간은 끝나고 마는 것이다.

한편 방이 비좁도록 친척들과 엉켜 자는 행복한 불편, 결속된 가족이 주는 따뜻한 각성, 가계 속에서 들고 난 사람들을 헤아리는 어떤 척척함, 결국 남자는 장남이건 아니건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자의식이 밀려오면, 이꼴 저꼴 안보고 일만 하는 여자들이 차라리 속편할 것 같기도 하다… .

나는 인생에서 가장 젊은 한 때를 군대에서 보냈으며, 종신토록 부양의 모든 책임을 진 남자다. 게다가 그 부담과 여자들의 명절 스트레스를 비교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미안함을 상쇄하려는 나쁜 남자다.

이충걸.'GQ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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