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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계경제] 2. 중동전쟁, 석유의 정치 경제학

중앙일보

입력

땅 속에서 석유가 솟구쳐 오른다. 한 청년이 환호성을 지르며 두 손을 벌려 석유에 몸을 맡긴다. 석유 투성이 사내가 고물 트럭을 타고 미친 듯 목장으로 달려 간다….

이 정도만으로도 영화 제목을 댈 수 있는 올드 팬들이 적지 않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1956년작 '자이언트'. 막 떠오르다 사라진 반항아 제임스 딘의 유작이란 점으로도 영화사에 남는다.

영화의 배경은 전후 석유개발 붐이 인 20~50년대 미국 텍사스주. 지미(제임스 딘의 애칭)가 맡아 열연한 젯 링크는 텍사스 석유 부호들의 복합 캐릭터다. 특히 한 미망인의 땅에서 석유가 나오자 석유를 마시며 샤워를 즐겼던 대드 조이너와 돈을 물쓰듯 한 석유 졸부 글렌 매카시를 떠올리게 한다.

20~30년대는 '휘발유의 시대''대개발의 시대'로 불린다. T형 포드로 시작된 자동차의 대량생산으로 휘발유 수요가 급증했고 유전개발이 붐을 이뤘다. 결국 대공황과 맞물려 '공급과잉의 시대'로 막을 내렸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동은 평화의 시대를 맞았다. 석유가 필요한 선진국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다. 자칫 또 다른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이 잠잠할 무렵 다른 지역에서 석유가 나왔다.

22년과 26년에 개발된 마라카이와 라키니라스 유전은 베네수엘라를 단숨에 석유생산 2위 국가로 끌어올렸다.

중동만 개발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선진국들과 석유회사들은 몸이 달았다. 논의를 거듭하다가 27년 마침내 합의를 이끌어냈다. '과거 터키가 지배한 지역에선 이권경쟁을 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중동의 석유 이권을 둘러싼 첫 약속으로 '적선협정(赤線協定)'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과거 터키의 지배 영역을 대충 빨간 펜으로 그린 데서 나온 말이다. 이후 중동 개발은 순조로왔고 이라크와 바레인에서 초대형 유전이 개발됐다.

미국 텍사스에서도 판이 벌어졌다. 30년 10월 킬고어 유전이 발견되자 20년대 내내 불던 석유개발 붐이 순식간에 광풍으로 변했다.

너도 나도 뛰어들어 주변 땅을 파면 석유가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유전의 넓이는 4백57㎦나 됐다.

하지만 킬고어는 미국 석유업계의 재앙이었다. 과잉생산으로 석유업계 전체가 망가진 것이다. 20년대 초 배럴당 1달러였던 유가는 30년대 10센트로 급락했다.

50년대 들어 텍사스에 다시 석유개발 붐이 일자 워너브라더스는 '자이언트'에 기대를 걸었다.'젊은이의 양지'(51년)와 '셰인'(53년)으로 이미 대가 반열에 오른 조지 스티븐스가 감독을 맡았다는 점 자체가 주목을 끌었다.

감독의 명성에 당대 최고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레슬리 역)와 록 허드슨(조던 베네딕트 역)이 따라왔다. 워너브러더스는 이들에게 각각 17만5천달러와 10만달러를 투자했다. 신참 지미의 몸값은 한참 아래인 2만달러선이었다.

영화는 제작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공은 유명 감독이나 주연 배우가 아닌 전적으로 헐값에 기용한 신예 스타 지미에게 돌아갔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 자체가 히트를 치게 만들었다.

'자이언트'촬영이 막 끝난 55년 9월 흰색 포르셰를 몰던 제임스 딘이 교통사고로 죽자 언론이 대서특필하며 그의 주가를 한껏 높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텍사스에서 또 하나의 신화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믈다. '자이언트'가 개봉되기 몇달 전 한 청년 기업인이 새로운 해저 탐사 방법을 동원해 해저유전을 개발했다.

조지 H.W.부시라는 이름의 그는 30여년 뒤 미국의 41대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10년 뒤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현 부시 대통령도 80년대에 유전을 찾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석유인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이 그가 벌이는 대테러 전쟁의 이면을 의혹의 눈빛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im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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