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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15) 받침대 총리의 동분서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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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03년 2월 28일 취임 인사를 하러 한나라당을 방문한 고건 총리가 박희태 당 대표 권한대행(오른쪽)과 찻잔으로 건배를 하고 있다. 둘은 고등고시 동기(13회)로 가까운 사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나 그들은 한·칠레 FTA 비준동의안 처리와 농업 지원대책을 두고 수차례 담판을 벌여야 했다. [중앙포토]

2003년 7월 21일 오후 5시 국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정균환 총무와 야당인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와 마주 앉았다.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안, 근로기준법 개정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안 등의 처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민생 안정과 사회 갈등 해소, 국가 신인도 제고를 위해 꼭 필요한 법안입니다. 정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7월 임시국회 회기 내에 꼭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몽돌’ 대통령과 ‘받침대’ 총리의 역할 분업은 시간이 가면서 진화했다. 중장기 개혁 같은 큰 그림은 노무현 대통령이 맡아 그렸고 일상적인 국정 운영은 내 몫이었다. 이날도 국회 관문을 넘지 못한 법안의 처리를 부탁하러 국회를 찾았다.

 현안은 쌓여 있는데 청와대에서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모든 부담이 나에게 넘어왔다. 정치적 권력이나 지분이 없는 총리가 국회를 상대로 쓸 수 있는 수단이 별다른 게 있겠는가. 설명과 설득, 때로는 읍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대형 암초를 만났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민주당과 통합신당(열린우리당의 전신)으로 쪼개졌고, 9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을 탈당했다. 여소야대 정국보다 더 험난한 ‘무당적(無黨籍) 대통령’ 사태를 맞았다.

 민주당과 통합신당 간 날 선 기싸움을 바라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해외 국정감사에 참석하려고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가 일본으로 떠나자 김원기 통합신당 창당주비(籌備)위원장과 김상현 민주당 고문이 각자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정 전 대표를 상대로 한 영입 경쟁 때문이었다. 양측의 설전도 치열했다.

 “노 대통령은 재산을 모으자 조강지처 버리고 새장가 가듯 단 한마디 의논도 없이 민주당을 배신했습니다.”(박상천 민주당 최고위원)

 “자기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도저히 해선 안 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민주당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김원기 통합신당 위원장)

 ‘국정은 어떻게 하나.’ 고민을 거듭했다. 초유의 상황이니 초유의 해법으로 돌파해야 했다. 이틀 후인 10월 1일 4당의 원내총무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초청했다. 한나라당 홍사덕·민주당 정균환 총무, 통합신당 김근태 원내대표, 자민련 김학원 총무가 참석했다.

 “제가 오늘 네 분을 모신 것은 노 대통령이 당적을 갖지 않은 현 상황에서 국회가 정부를 잘 좀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산적한 민생 현안을 처리하려면 국회와 정부 간 협력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민주당 정균환 총무와 통합신당 김근태 대표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없진 않았지만 네 사람 모두 내 의견을 수용해 줬다. 야당이면서도 내 제안에 적극적으로 응해 준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의 도움이 컸다. 정부와 여당이 하던 당정협의를 대체할 4당 국정협의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한 달 2~3번, 총리공관과 국회 귀빈식당을 오가며 협의회를 열었다. 4당의 정책위원회 의장단과 하는 정책협의회도 함께 가동했다.

 태풍 ‘매미’ 피해복구를 위한 3조원의 추경(추가) 예산안, 한·칠레 FTA 비준안, 이라크 추가 파병안 등 굵직굵직한 법안이 4당 국정협의회를 거쳐 갔다. 물론 국정협의회에서 4당이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해도 관문은 남아 있었다.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 등 세 고비를 넘어야 했다. 중요하고 시급한 법안이 막혀 있다면 최전선인 국회에 직접 갔다.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상임위원장실도 찾아가고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실에 가기도 했다. 총리는 본회의나 예결위, 당정협의 출입만 한다는 전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2004년 2월 16일 오후 한·칠레 FTA 비준안의 본회의 의결 직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한나라당 박희태·이상배 의원 등과 직접 담판을 벌였다. 박 의원은 FTA를 반대하는 농어촌 의원들의 대표 격이었다. 고시 동기라 친하고 말도 통하는 사이였지만 이때만큼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정부가 119조원 규모의 농업지원 종합대책을 내놓고 금융대책도 추가했지만 본회의에서 다시 가로막혔다. 고심 끝에 마지막 양보를 했다. “1600억원으로 정한 FTA 지원특별기금의 올해 예산을 5000억원으로 늘리겠습니다.”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오후 2시 본회의에서 한·칠레 FTA 비준안은 가결됐다.

김기춘

 전화도 유용한 수단이었다. 국회 회기가 얼마 남지 않은 2004년 3월 김기춘 법사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건=시급한 법안이 있습니다.

 ▶김기춘=무슨 법안이 그렇습니까.

 ▶고건=개인채무자 회생법안입니다. 지금 카드채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번 회기를 넘기면 큰일 나겠습니다.

 ▶김기춘=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해보지요.

 전화로 한 부탁은 효과를 봤다. 개인채무자 회생법안은 국회 회기의 ‘막차’를 타고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 법안 통과가 늦어져 국정 수행에 큰 지장을 받은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총리가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동안 청와대에선 아무런 도움도, 말도 없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사건

신(新)4당 체제와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 42명이 민주당을 나와 2003년 9월 20일 ‘국민참여통합신당’을 만들었다. 민주당 내 노무현계 의원들(신당파)과 그렇지 않은 의원들(구당파·잔류파) 간 갈등이 원인이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2개 당으로 쪼개졌고, 한나라당·민주당·통합신당·자민련의 4당 체제가 됐다. 과거 민정당·민주당·평민당·공화당의 4당 체제와 구분해 신4당 체제라 불렸다.

 통합신당이 출범하자 노 대통령은 신당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 발언을 민주당과 야당에서 문제 삼자 9월 29일 노 대통령은 “나의 당적 문제가 정치 쟁점화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민주당적을 포기하겠다”며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후 재신임 정국, 탄핵소추 사태의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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