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 폭언 시달리던 30대男, 소변서…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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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감정은 감기처럼 전염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울로 비추듯 무의식 중에 분노의 행동과 감정을 모방하게 된다. [김수정 기자]

직장인 이성엽(38·가명)씨는 요즘 집에 가기가 무섭다. 아내와 갓 돌이 지난 딸 아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아서다. 이씨의 이런 행동은 6개월 전 회사에서 같은 팀으로 배정이 된 김 부장과 함께 일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김 부장은 사소한 업무에도 화를 내며 이씨에게 폭언을 일삼는다. 업무 배정 변동 석 달 만에 이씨는 잠을 자다가도 벌떡 깨거나 헛소리를 했다. 깊이 잠들지 못하자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김 부장의 폭언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사소한 반찬 투정부터 시작해 아내에게 크게 화를 내기 일쑤였다. 이씨는 집에 돌아오면 김 부장처럼 변하는 자신의 모습이 두렵다.

자주 화 나는 건 뇌가 분노에 중독된 탓

화를 내는 한국인이 많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단 화부터 낸다. 특히 직장 내에서 분노 조절의 어려움으로 부서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하주원(정신건강의학과) 책임연구위원은 “직장 내 분노로 인한 폭언이 발생하면 가해자는 분노 조절을 못한 것에 대한 후회로 괴로워하고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힘들어한다. 목격자도 충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쉽게 화를 내는 이유는 뇌가 분노에 중독돼서다.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우종민 교수는 “감정의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에서 분노의 감정을 뇌에 자동 저장해 스트레스 상황에서 조건 반사처럼 화를 내게 된다”고 말했다. 분노에 중독되면 화를 내는 시간도 점차 앞당겨진다. 우 교수는 “분노가 학습이 되면서 뇌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분노를 표출하는 시간이 단축된다”고 말했다. 신경과 신경 사이의 연결이 빨라져 화 내는 시간이 0.5초 만에 이뤄졌다면 0.1초로 줄어든다.

분노에 중독돼도 신체는 좀처럼 쉽게 적응되지 않는다. 분노의 감정을 자주 표출하다 보면 뇌세포가 손상돼 뇌가 위축된다. 우 교수는 “2005년 하버드 의대 연구진에 따르면 분노에 중독된 뇌는 뇌 변연계의 해마와 편도 부위의 볼륨이 정상 뇌보다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분노에 중독되면 사소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뇌신경세포에서 분노 호르몬인 노르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증가되면서 교감신경계가 강한 흥분 반응을 일으킨다. 이 호르몬이 기억을 담당하는 측두엽의 뇌세포에 독소로 작용하면서 뇌세포가 손상된다. 가슴 두근거림, 혈압 상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면 엔도르핀·세로토닌 같은 행복호르몬은 상대적으로 분비가 줄어든다. 이 때문에 감정조절·집중력·사리판단을 관장하는 전전두엽의 조절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분노도 감기 바이러스처럼 전염

문제는 분노가 감기 바이러스처럼 전염된다는 것. 한 사람이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면 다른 사람에게 감정과 행동이 전달된다. 우 교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하는 ‘거울 신경’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울로 비추듯 화난 표정과 행동을 뇌세포가 자연스럽게 모방하게 돼서다. 동작뿐 아니라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특히 분노의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전염 속도가 빠르다. 인간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분노 호르몬은 분비 15초 뒤 최고조

분노에 전염된 사람은 무의식 중 자신보다 감정적으로 만만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배우자나 자녀, 직장 후배, 미혼 여성은 엄마가 대상인 경우가 많다. 우 교수는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부하 직원이 아내에게, 아내가 자녀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아 분노에 중독된 사람 주변으로 건강하지 못한 집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자녀가 대상인 경우도 있다. 하주원 책임연구위원은 “이때는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분노의 수채구멍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분노를 조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다.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방법·시간·목적으로 분노를 표현해야 건강해진다. 우 교수는 “분노의 원인이 된 사람에게 적당하게 화를 내는 것도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만약 직장상사 등 제대로 분노를 표출할 수 없는 상대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노의 호르몬인 아드레날린 코티솔은 호르몬이 분비된 지 15초가 되면 최고조에 이른다. 2분이 지나면 서서히 수치가 떨어진다. 15분이 지나가면 정상치로 돌아온다. 이 때문에 분노 감정을 느끼더라도 확정된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분노호르몬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심호흡을 하면서 기다려본다.

제대로 화내는 법 익혀야 건강

시간을 가졌는데도 분노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는다면 그 상황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심호흡을 하거나 주문을 외운다. 우 교수는 분노를 조절하는 스트레칭(사진)을 소개했다. 격렬한 운동이나 한 시간 이상 숲길을 산책하면서 화난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도 도움이 된다. 화가 치솟을 때 가슴이 답답하고 굳어 있는 몸 상태가 된다면 복식호흡을 해본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무엇 때문에 분노가 생겼는지를 종이에 쓰는 것도 도움이 된다. 논리적으로 객관적인 상황을 바라봐야 분노를 떨칠 수 있다.

글=장치선 기자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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