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워커」와 고무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팔순의 할머니가 제주도 한라산을 젊은이들을 뺨칠 속도로 거뜬히 정복했다는 보도를 읽고 생각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천고마비라고 하지만 가을 하늘이 높은 것과 살찐 말을 보기 위해선 진실로 살찐 말을 오르는 것이 상책이리라는 것.
그 다음 어제 개막한 국체에 등산이나 「워킹」이라는 종목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등산 인구가 날로 늘어가는 현실을 참작해서 다음부터는 등산을 국체 종목으로 등장시켰으면 하는 것.
그런데 우리가 하는 등산에는 지양해야 할 점이 더러 있다. 등산객들의 지나친 장비욕이 그 하나이다. 등산을 하려면 등산모에서, 「스키·파카」,「코헤르」일식에서 「워커」구두에 이르는, 만반의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산이라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그 많은 장비를 한꺼번에 갖출 여유가 없고, 아무렇게나 차려 입고 나서는 것은 기분도 안나고 등산도에도 어긋나는 것처럼 버릇이 있다.
그래서 등산객들의 옷차림과 장비는 해마다 철마다 호사와 화려를 더해 간다. 야산에 오르거나 그나마도 오르다 말고 어중간한 곳 물가에 퍼져 앉아 불고기와 소주 타령으로 산의 정기를 흐려 놓는 족속일수록 갖춘 장비와 옷차림·신발 차림이 요란스러운 법.
어제 본지에 실린 그 할머니의 사진을 본 등산가들이 누구나 느꼈어야 할 일이 있다. 진짜 등산객은 산을 즐기고 산과 하늘이 베풀어주는 색채의 향연을 즐기고 정상으로 뚫린 오솔길을 즐길 따름, 몸에 걸친 옷가지나 신발의 모양에는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값진 장비와 약칠한 「워커」구두나 영국 군화로 알려진 투박한 등산화를 과시하면서 가령 백운대 꼭대기에 이르러 「히말라야」쯤을 정복한 듯 대견해 하는 것은 풋내기. 그는 광목 치마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은 노파가 미리 와서 과일전을 펴고 태연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받는 충격과 같은 것을, 이 한라산 노파의 차림 없는 차림새에서 받아야 한다. 고무신 만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