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프랜차이즈 역사 (10) - 애너하임 에인절스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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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아메리칸리그가 내셔널리그와 대등한 빅리그임을 스스로 선언하여 빅리그 팀 수가 총 16개가 된 뒤, 60년 동안 그 수는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20세기 전반기의 팬들은 아마 팀 수가 영원히 16개로 고정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적·문화적 중심지가 점차 동부 지역 밖으로 확장되고 신흥도시 팬들의 빅리그 팀에 대한 요구가 힘을 얻음에 따라, 구단 증설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1961년, 마침내 두 새로운 구단이 빅리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두 구단 중 하나는 미네소타로 떠난 워싱턴 세너터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세너터스였고, 나머지 하나가 로스앤젤레스(LA) 에인절스였다.

에인절스의 첫 구단주는, 과거 서부극 배우와 가수로 명성을 날렸으며 방송사 운영 등으로 대부호가 된 진 오트리였다. 그는 1960년 LA 다저스의 구단주 월터 오말리가 자신의 라디오 방송사와 맺은 전속 중계 계약을 연장하기를 거부하자, 캘리포니아 주에 새로 만들어지기로 되어 있었던 아메리칸리그 팀을 자신이 직접 소유하여 중계권의 이득을 계속 누리기로 결심하였다.

다저스는 1958년부터 LA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으며, 당시 LA에 새 팀이 생기면 그 구단은 연고지 공유의 댓가로 다저스에 35만 달러를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대주주였던 빌 빅도 새 캘리포니아 팀에 한때 관심을 보였으나, 그는 그러한 명목으로 거액을 지불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오트리가 나서서 그 금액을 다저스에 지불하였다. 또한 그는 기존 팀의 선수들을 익스팬션 드래프트를 통해 데려가는 대가 명목으로 210만 달러를 추가로 지출하는 데에도 동의하여, 마침내 새 팀의 구단주가 되었다.

에인절스는 익스팬션 드래프트에서 뛰어난 선구안으로 유명했던 3루수 에디 요스트와 1950년대 내셔널리그 최고의 슬러거 중 하나였던 1루수 테드 클루셰프스키 등을 선발하였다. 또한 카디널스에서 리언 왜그너를 영입하였고 포수 얼 더글러스 에이버릴과 외야수 켄 헌트 등도 확보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한편 에인절스는 과거 퍼시픽코스트리그의 LA 팀 홈구장이었던 리글리필드를 일단 사용하게 되었다. 이 구장은 1925년 건립될 당시부터 소유주 윌리엄 리글리 주니어의 이름에서 나온 명칭인 '리글리필드(Wrigley Field)'로 불렸다(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은 당시에는 '위먼파크'로 불리고 있었다). 이 구장은 펜스 중앙 부분이 타석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홈런타자들에게 어드밴티지를 주는 구장이었다.

준비를 마친 LA 에인절스는, 1961년 4월 1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원정경기를 치름으로써 드디어 빅리그에 데뷔하게 되었다. 에인절스는 이 경기에서 기분좋게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시즌을 77승 84패로 마감하였다. 이는 신생팀이 창단 첫 해에 거둔 성적으로는 역사상 최고이다. 특히 팀 홈런 부문에서 에인절스는 양키스에 이어 리그 2위에 올랐으며, 팀 멤버 5명이 2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인 1962년, 에인절스는 리글리필드를 떠나 다저스와 홈구장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다저스는 이 구장을 항상 '다저스타디움'으로 불렀으나, 에인절스는 구장이 위치한 곳의 지명인 '차베스러빈(Chavez Ravine)'을 그대로 구장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이 해에 보 벨린스키는 오리올스를 상대로 노히트게임을 기록하여 에인절스 투수로서는 처음으로 이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다. 또한 신인투수 딘 챈스는 2.96의 방어율로 이 부문 리그 4위에 올랐으며, 1루수 리 토머스는 타선의 중심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이 해에 에인절스는 한때 당대 최강팀 양키스를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시즌 막판에 급격히 무너지며 리그 3위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에인절스는 1963년에는 타선의 부진으로 리그 10개 팀 중 9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4년, 다시 5할 이상의 승률을 올리며 5위로 도약하였다. 또한 챈스는 이 1964시즌에 에인절스 투수로서는 처음으로 사이영상 수상자가 되었다.

챈스는 이 해에 방어율과 다승 부문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빅리그의 모든 투수들 중 가장 많은 완봉과 완투를 기록하였다. 더불어 7월 11일부터 8월 18일까지는 9연승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사이영상 투표권을 가졌던 20명의 기자 중 17명이 챈스에게 표를 던졌으며(1969년까지는 한 기자가 한 투수에게만 표를 던지게 되어 있었음), 그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의 4시즌을 통틀어 샌디 코팩스 외의 투수로서는 유일하게 사이영상을 받은 인물이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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