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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 영화계… 큰 물결은 SF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전대미문의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한국 영화계.

그 에너지가 새해에도 변함없이 분출될 수 있을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올해도 지난해의 기세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작품의 규모나 다양성 면에서 풍성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다. 제작.배급.홍보.평론 등 영화계 구석구석에서 뛰고 있는 전문가 10명을 통해 '2002년 영화계 지형도'를 미리 그려본다.

임오년(壬午年) 영화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SF대작이 끊이지 않고 나온다는 점이다. 새해 극장가를 과거, 혹은 미래를 다룬 SF물이 장식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 작품들은 최소 50억원 이상을 들인,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 해당 영화의 흥행 결과에 따라 영화계의 향배 또한 크게 변할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올해 개봉됐던 대표적 블록버스터인 '무사'와 '화산고'의 성적이 기대치에 못미쳤다. 팽창한 투자비 만큼 수확이 튼실했지 못했던 것. 올 새해 개봉될 SF영화마저 지난해의 전철을 밝는다면 한국영화의 '대작 붐'은 당분간 주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올해는 한국영화의 산업화 과정에 중요한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상명대 조희문 교수는 "지금까지의 영화계가 몸집 불리기에 주력했다면 올해는 내부적 안정을 도모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SF 물결은 내달 초 시작된다. 2009년에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가상의 역사를 전제로 지난 1백여년의 한.일관계를 초대형 액션으로 펼쳐보일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이시명 감독.85억원) , 2020년 통일된 한반도를 파괴하려는 범죄집단과 경찰 요원들의 대결을 그릴 '예스터데이'(정윤수.50억원) , 사이버 공간에서의 환상적 액션을 선보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장선우.1백10억원) , 2080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본격 SF물 '내츄럴시티'(민병천.85억원) 등이 두 세달 간격으로 개봉된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들 영화가 새해 극장가를 이끌어갈 것으로 점치고 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시나리오의 완성도, 연출력이 인정된 감독, 그리고 스타급 연기자 등 흥행의 3박자를 갖춘 이 영화들이 시장을 주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풍부한 자본과 성숙된 기술로 무장한 한국영화계가 찾아낸 새로운 소재가 SF라는 분석이다.

반면 올해엔 지난해 '조폭'같이 특정 소재가 스크린을 점령할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재미있는 일은 형사영화가 많이 나온다는 점. 우리 영화계의 최고 실력자인 강우석 감독이 3년만에 들고 나오는 '공공의 적'(25일 개봉) 을 필두로 '로스트 메모리즈''예스터데이'등이 기다리고 있다. 그만큼 영웅주의류의 강인한 남성코드가 극장가를 선도할 것으로 점쳐진다.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한국형 SF영화는 아직 완성도를 예단할 수 없다"며 "소재의 신선함 하나로 관객들을 끌어들이기엔 힘이 부칠 수 있다"고 말했다.

2002년의 반가운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작가주의 계열의 감독들이 대거 복귀한다는 점이다. 개인.사회의 모순을 꿰뚫는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김기덕 감독의 신작 '나쁜 남자'(11일) 는 이미 올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을 예약한 상태. 또 칸영화제 2회 진출을 노리는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1999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스타가 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도 기대작이다. 전작 '삼인조'등에서 보여줬던 박감독 특유의 비주류적 감성이 어떤 식으로 변형될지 궁금하다. 또 '초록물고기''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과 '강원도의 힘''오! 수정'등의 홍상수 감독이 각각 신작 '오아시스'와 '생활의 발견'으로 스크린을 노크한다.

이들 작품이 지난해 영화계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얼마나 개선할지도 주목거리다.

평론가 전찬일씨는 "2년 전 '반칙왕'과 'JSA'처럼 평단과 일반 관객이 고루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 올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심재명 대표도 "임권택.홍상수.이창동 등 역량 있는 감독의 신작이 선보임으로써 올해는 그 어떤 시기보다 풍성한 식탁이 차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감독들의 활발한 진입도 긍정적이다. '일단 뛰어'(조의석) , '해적, 디스코 왕이 되다'(김동원) , '라이터를 켜라'(장항준) , '울랄라 씨스터즈'(박제현) , '하얀방'(임창재) 등 그 어떤 해보다 신인 연출가들의 진입이 왕성해질 조짐이다.

특히 16㎜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인터넷 영화 '다찌마와 리'로 급거 부상했던 류승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피도 눈물도 없이'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전도연.이혜영이란 실력파 여배우를 앞세운 누아르풍 액션물이다.

이처럼 올 영화계는 백가쟁명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된다. 소재.주제.장르.감독 등 예년에 비할 수 없는 활기가 넘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월드컵 개최, 대선.지방선거 등 영화 외적 요인으로 극장가의 열기가 가라앉을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50%에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던 지난해의 한국영화의 돌풍이 재연되기 어려운 구석도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일단 한국영화가 자신감을 찾고 관객들의 신뢰도 얻은 만큼 급격한 하락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또 "내수시장이 포화될수록 눈길을 해외로 돌리려는 노력 또한 왕성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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