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매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6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바야흐로 매화 철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식 때 붉은 바탕에 매화 무늬가 흐드러진 두루마기를 입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다른 꽃들보다 먼저 피어나는 매화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매화는 선비의 꽃이다. 이른 봄 먼저 피어 은은하게 그 향기를 퍼뜨리는 모습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맑고 깨끗한 정신을 지키려는 선비를 상징했다.

 조선 후기엔 특히 ‘매화초옥(梅花草屋)’을 주제로 한 그림이 널리 그려졌다. 속세와 연을 끊고 숨어 사는 선비의 삶,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주제다. ‘매화초옥’의 대표선수는 고람(古藍) 전기(1825∼54)다. 29세로 요절한 그는 이 주제의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단연 개성적인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의 ‘매화초옥’, 왼쪽 것이다.

전기(田琦), 매화초옥(梅花草屋), 19세기, 지본담채, 32.4×36.1㎝, 국립중앙박물관.

 어스름 내린 잿빛 하늘, 곳곳에 남은 눈이 더욱 희다. 산에는 백매(白梅)가 흐드러져 눈송이 날리는 듯하다. 초가집 안 초록 옷 입은 사람은 피리를 불며 멀리서 올 친구를 기다린다. 붉은 도포의 벗은 거문고 둘러메고 이제 막 다리 건너 산으로 올라가려는 참이다. 매향 교교한 가운데 벗이 재회해 피리 불고 거문고 타면 산속엔 마시지 않아도 취흥 가득하겠다.

 초옥의 주인인 역매(亦梅) 오경석(1831∼79)과 그를 찾아가는 전기 자신을 그렸다. 심미안을 나누던 벗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그림이며,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올 것을 희구하는 그림이다. 전기의 재주를 아꼈던 우봉(又峰) 조희룡(1789∼1866)이 적었듯, 그의 그림 속 사람이 되고 싶다.

 전기는 서울 수송동에서 약포를 운영하는 중인으로, 스스로 시를 배우고 그림을 익히며 숱한 벗을 사귀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정한 법식이 없고 다만 가슴속의 생각을 곧바로 드러낼 뿐”이라 적었다.(최열, ‘화전(畵傳)’) ‘매화초옥’이 참으로 그렇다. 이 고전적 주제는 담채와 호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당대 도시 중인들의 장식 취미를 대변한다.

 ‘매화초옥’은 아쉽지만 현재 볼 수 없다. 수장고에서 쉬고 있다. 박물관은 대신 최근 소장품 상설전을 교체하면서 2층 화조영모화실에 조희룡의 ‘홍백매도(紅白梅圖)’ 8폭 병풍을 내놓았다. 섬세한 전기의 것과는 달리 힘이 넘치는 대작이다. 이 한 점으로 감질난다면 서울 삼성동 포스코미술관으로 가보자. ‘梅花(매화) 피어 천하가 봄이로다’라는 제목의 전시가 다음 달 20일까지 이어진다. 어몽룡·강세황·조희룡·김은호·이응로 등의 매화 그림 90여 점이 전시장에 먼저 피었다.

권 근 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