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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현욱의 과학 산책

초파리가 알코올을 좋아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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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코메디닷컴 편집주간

초파리의 대표적 천적은 애벌레의 몸에 알을 낳는 기생 말벌이다. 알이 부화하면 애벌레를 몸속에서부터 먹어 치운다. 그렇다면 천적이 얼쩡거리는 상황에서 알을 낳아야 하는 초파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알코올 농도가 높은 장소를 선호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2일 미국 에머리대학 연구팀이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의 내용이다.

초파리는 너무 익어서 발효 중인 과일에서 자라는 곰팡이와 박테리아를 먹고 산다. 따라서 발효로 생성되는 알코올에 상당한 내성이 있다. 지난해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말벌 알을 가진 초파리 애벌레는 알코올 함량이 높은 먹거리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생존율을 크게 높여주는 행태다. 말벌은 알코올의 독성에 내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연구팀은 초파리 어미의 행태를 조사해 보았다. 암컷 노랑초파리들을 기생말벌이 있는 곳과 없는 곳(그물 우리)에 각각 풀어놓고 먹이를 담은 배양접시 2개를 놓아두었다. 접시 중 한 개에는 6%의 알코올이 함께 담겨 있었다. 24시간 후 조사 결과 말벌 우리의 초파리는 알의 90%를 알코올 접시에 낳은 것으로 나타났다. 말벌이 없으면 이 비율은 40%로 떨어졌다.

 추가 실험 결과 초파리는 말벌 암컷이 있을 때만 산란 행태를 달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컷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또한 냄새가 아니라 시각으로 말벌을 식별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돌연변이로 냄새를 맡지 못하는 초파리와 앞을 보지 못하는 초파리를 이용했다. 그 결과 시각이 있는 초파리는 암컷 말벌이 곁에 있으면 산란장소로 알코올 접시를 선호하는 행태를 보였다. 시각을 잃은 것은 그렇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들 초파리는 실험실에서만 번식했기 때문에 수백 세대 동안 한 번도 말벌을 본 적이 없다”면서 “그런데도 말벌, 그중에서도 암컷만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말했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초파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특정 신경전달물질(NPF)의 수준이 낮아지며 이것은 알코올을 찾는 경향과 관련이 있다. 이번 연구에선 주변에 기생말벌이 있으면 뇌속의 NPF 수준이 낮아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알코올을 선호하는 산란행태는 말벌이 없어진 뒤에도 평생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장기 기억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생물의 진화가 보여주는 놀라움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조 현 욱 객원 과학전문기자·코메디닷컴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