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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리뷰] 소름- 저주받은 DVD

중앙일보

입력

인간이나 동물에게 있어 기억이란 생존의 도구로써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과는 달리 복잡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은 생존의 도구이외의 의미를 가집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에서 레오나드의 기억은 휘발성입니다. 10분간의 과거밖에 기억해 낼 수 없는 그에게 있어서 기억은 곧 사진과 자신이 써놓은 짧은 노트입니다. 하지만, 그 기억도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왜곡시킨 것이었음이 밝혀집니다. 홍상수감독의 오! 수정에서는 사람에 따라 같이 경험한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픈 유어 아이즈나 토탈리콜,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속에선 아예 인간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바꾸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객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또한 그 기억의 존재자체마저 의문시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무게의 괴로움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기억 3부작이라는 단편영화로 소름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던 윤종찬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꾸준하게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 해왔습니다. EBS방송을 통하여 소개된 그의 풍경과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과거로 가진 못하지만 과거를 기억할 순 있다는 식의 현재에서 억지로라도 잡아 볼려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연출을 볼 수 있었다면, 소름에선 반대로 전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현재의 주인공 용현에게로 점점 다가와서 현재와의 구분이 힘들어지게되는 악몽과도 같은 과거의 기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감독이 왜 이토록 죽음과 기억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금번에 발매된 DVD를 접하면서 어느정도 그것이 95년 삼풍백화점사고로 말미암아 떠나보낸 아내에 대한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될 순 없겠지만 말입니다.

소름은 비록 호러영화의 양식을 가지고 있으나 오히려 일반적인 호러영화와는 달리, 슬픈 드라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등장인물들이 운명에 의하여 서로 얽히면서 어떠한 좋은 기억도 없이 견디기 힘든 비극을 향하여 치닫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악인이 죽음으로써 (비록 다음편 제작을 암시하는 징조를 보이긴 하지만) 결말을 맺는다던가, 갑자기 놀래키는 방식 혹은 잔인한 영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관하는 방식이 아닌, 열려있는 앤딩을 채택하여 다시금 볼 때마다 색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게 했다던가, 충분히 관객을 놀래킬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점, 그리고 피나 유령의 등장보다 분위기로 승부를 건 것은 소름의 강점이 비쥬얼보다도 오히려 네러티브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소름은 감독의 97년작 45분길이의 중편인 메멘토뿐만 아니라 또 다른 단편들인 플레이벡과 풍경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단편3편을 두 번째 디스크에 함께 담고 있는 소름 DVD는 완벽한 서플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풍경에서 이스라엘인은 자신의 히브리시가 천천히 현실로 변해가는 꿈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는 점멸하는 신호등이나 네온사인의 이미지는 고스란히 소름에서의 조명방식으로도 사용됩니다.)

죽은자에 대한 기억의 매개체로 플레이백에선 녹음테잎을, 메멘토에선 론의 소설책이 그리고 풍경에선 16미리 필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편 메멘토의 장편격인 소름에선 역시 소설과 사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메멘토와는 달리 소름에서의 소설책이란 현실 및 과거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그 형태를 갖추어 나간다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존 카펜터의 매드니스에서처럼 소름에서의 현실은 소설의 이야기대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현실의 이야기대로 소설 또한 쓰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름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연상케 합니다. 이것은 단지, 한정적 공간인 미금아파트와 오버룩호텔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소설가인 잭이 과거의 원혼에 의하여 미쳐버림으로써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것은, 좁은 복도씬들과 함께 (이것은 오히려 메멘토에서 더 많이 연상이 되는데) 역시 소설가 이씨의 (혹은 죽은 광태의) 소설과 상호작용을 이루며 아파트에서 죽은 자신의 어머니가 작용시키는 운명대로 자신의 가족 (선영)을 죽이는 용현에게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잭이 결국 과거의 사건과 반복되게 가족들을 해 할려고 했던 것처럼, 용현역시 피할 수 없는 과거와 맞물려 있는 운명으로 인하여 여동생이자 유사 배우자이기도 한 선영을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소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캐릭터들간의 얽히고 설킨 관계들로 병렬 및 순환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아내를 죽이고 옆집의 여자에게로 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갖난아기(용현)는 택시기사가 되어 자신이 버림받았었던 바로 그 30년전의 장소인 미금아파트 504호로 되돌아 옵니다. 그는 옛애인인 미정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반복의 연장선상에서 선영마저 죽입니다. 물론 이것은 감독과 정성일씨의 해설대로 남편에 의하여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어머니의 아들을 통한 복수로도 볼 수 있겠으나 또한 다른 관점에선 부부싸움으로 인하여 아들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하였던 선영에게 모성애를 느낀 용현의 자신을 버렸던 부모에 대한 복수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선영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와 헤어졌다는 점에서 용현의 어머니와 같은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죽음은 자신의 오빠이자 또한 어떤 점에선 잠시동안 배우자였던 용현과의 관계가 시작되면서 정해져 있는 결말이었습니다.

미금아파트는 용현의 어머니와 선영의 아이, 용현이 이사오기 전 의문의 화재사고로 죽어 버린 광태, 선영의 남편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한 채 근처에서 죽어간 (혹은 삼풍백화점에서 희생당한 원혼들) 영혼들이 총체적으로 살아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용현은 어머니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은수는 죽은 남자친구 광태를 보게되며 또한 선영은 죽은 아이를 보게 됩니다.

영화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환타지와 비환타지 영화들로 모든영화들을 나눌 수도 있겠죠. 대부분의 호러영화가 환타지장르에 속하는 것에 비하여 소름은 오히려 비환타지장르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영화속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 판타지적 악몽으로 치기엔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호러적 소재를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네러티브만으로 충분히 공포적 분위기를 살린 영화 소름은 호러무비에서도 작가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감독의 장편데뷔이전 단편영화수록과 영화필름제공, DTS사운드 녹음에 잡지키노의 전편집장이었던 정성일씨와 함께하는 감독의 코맨터리는 계속되는 출시연기와 함께 유저들에게 기대감을 잔뜩 부풀리게 만든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럼 소름의 DVD적 측면은 어떠한지 보겠습니다.

몇부분을 제외하곤 실사조명을 사용하여 제작된 소름은 감독의 전작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극장상영시에도 어두운 부분에서 거친입자의 화면재질을 보여주었습니다. DVD에서도 이점은 보완되지 않고 있으며 어두운 장면을 자세히 보게되면 번들거림이나 얼룩이 보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밝은 화면에서의 화질은 괜찮은 편이나 역시 어두운 화면이 많은 소름에서는 그만큼 깨끗한 화질을 기대하기 힘든 편입니다. 디스크1의 메인메뉴화면에서 조금의 끊김 현상이 있는 것도 거슬리는 부분입니다.(총점: 3.4점/5점)

DTS로 녹음된 사운드는 비록 영화의 특성상 사운드를 십분 발휘하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천둥과 함께 계속해서 내리는 빗소리는 공간을 꽉채워주고 배경음악으로 쓰인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잔잔한 소리는 프론트에서 리어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음산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의 효과음들도 영화만큼이나 현실감있게 녹음되었습니다. 감독의 코맨터리와 함께 들려오는 영화의 음향은 강약의 연속성없이 녹음되어 명확하게 들리질 않습니다. (총점: 3.8점/5점)

서플에서 역시 눈에 띄는 부분은 감독의 단편 영화3편입니다. 비록 단편영화 모음집만으로도 DVD가 출시되고 있기는 하나, 역시 아직까지는 감독의 장편데뷔이전 단편작품들을 서플로써 수록하고 있는 타이틀이 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록된 단편중 메멘토의 경우, 오른쪽 사운드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외에도 인터뷰형식으로 이루어진 감독과 정성일씨의 코맨터리, 메이킹필름 그리고 영화필름이 다섯프레임정도 함께 포장되어 있습니다. 포스터 촬영장면은 홈페이지 메이킹필름에서 오히려 배경음과 함께 수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도 없이 재수록되어 있으며, 부천영화제 동영상도 사운드없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장진영의 분장장면은 분장의 완성된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으며, 기타 엽기적인 그녀의 서플에서도 봤었던 텍스트형식으로 수록된 여러 가지 짧은 서플들은 군더더기로 까지 보이는 부분입니다.

비록 홈페이지 메이킹필름에 조금 보여주고는 있지만, 상당부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삭제씬들이 서플로 포함되지 않은 것도 역시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단편 3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소름 DVD의 서플을 빛나게 하는 부분입니다. (총점: 4.2점/5점)


이발소에 걸려있던 좌측의 사진에서 갖난아기는 바로 용현입니다. 그리고 죽은 선영의 지갑에서 찾아낸 우측 사진의 아버지와 바로 동일인물이 좌측의 사진에서도 발견되죠. 선영과 용현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단서입니다.


■ 디스크사양
상영시간: 109분
지역코드: 3번
디스크수: 2장 (듀얼레이어)
출시사: 아틀란타 컨텐츠그룹
화 면 비: 1.85:1 (아나몰픽 무지원)
더빙언어: 한국어 (DTS, DD5.1 및 DD2.0)
서브타이틀: 한국어, 영어 및 일본어

■ 서플먼트
- 배우 및 감독소개
- 극장예고편
- 영화 하이라이트
- 스틸 갤러리
- 영화소개 (텍스트)
- 프로덕션 노트 (텍스트)
- 시놉시스 (텍스트)
- 기타영화 예고편
- 감독 및 배우 인터뷰 (동영상)
- TV예고편
- 감독 코맨터리
- 장진영 분장장면 (동영상)
- 포스터 촬영장면 (동영상)
- 홈페이지 메이킹필름
- 부천영화제 동영상
- 감독의 중단편 3편 (플레이백, 메멘토, 풍경)
- 영화필름포함

소름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10여분입니다. 점멸되는 조명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용현을 슬로우로 잡고 (이때는 정말 무엇인가가 나올법도 한데) 아파트를 나선 용현이 바라보는 미금아파트의 한구석에는 비록 아무것도 없지만, 어떤기운마저 느껴지는 듯하니 말입니다.

소름은 전체적으로 안타까운 DVD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대로만 출시되었다면 한국영화 최고의 DVD타이틀이 될 수도 있었을 작품인데,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미흡한점들로 완성도면에서 많이 뒤쳐지는 타이틀이 되어 버렸습니다. 용현어머니의 저주스런 운명이 DVD에도 내려진 것일까요? (^^;) 하지만 영화 소름과 윤종찬감독의 단편들을 좋아하는 분들에겐 필소장품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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