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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문명으로서의 유로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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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를 순방하는 해외여행에서 가장 번거로운 것은 방문하는 나라가 바뀔 때마다 그 나라 것으로 돈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귀국할 때는 주머니에 쓰다남은 여러 나라의 동전과 지폐가 남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2002년 새해가 되면 적어도 15개국 유럽연합(EU)의 12개국에서는 이런 부담이 사라진다. 영국.스웨덴.덴마크를 제외한 나라들이 유로라는 전례없는 단일통화를 채택하는 것이다. 그들 나라 3억의 유럽인은 새해 첫날부터 지금까지 쓰던 돈을 버리고 유로화를 쓴다. 라인강의 기적의 상징 도이치마르크도 독일인들의 아쉬움속에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 12개국 3억명 통합 실험

유로를 사용하는 나라들을 지칭하는 유로랜드에서는 지난 9월 1일부터 1백40억장의 지폐와 5백억개의 동전을 수송하는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됐다. 유럽의 기업들은 이미 유로화의 유통에 대비해 동유럽 지역으로 생산거점을 많이 옮기고, M&A를 통한 시장의 주도권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유통업체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지금의 유럽은 대개 서기 800년 샤를마뉴(찰스)대제가 프랑스.독일.벨기에.네덜란드의 접경지역인 아헨에서 카롤링왕조를 일으키면서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 사를마뉴의 제국은 10세기 초 오토 1세에서 시작되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이어져 19세기 초까지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유럽대륙의 심장부를 통합하는 역할을 해냈다.

카롤링왕조와 신성로마제국이 정치적인 권위로 유럽대륙을 느슨하게 통합했다면 유로는 같은 지폐와 같은 동전의 사용을 통해 처음에는 문화.심리적으로, 다음에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필경에는 정치적으로 유럽 전체를 통합하는 역사적인 실험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우선은 3억 유럽인들만이 유로로 일상생활을 한다. 그러나 갤럽조사에 따르면 유로 채택에 찬성하는 영국인은 소수지만 영국도 결국은 유로화를 채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운명적인 생각을 가진 영국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스웨덴 국민의 22%가 지난 6개월 사이에 유로 반대에서 찬성으로 입장을 바꿔 전체 스웨덴 사람의 51%가 유로를 지지하고, 덴마크 국민들은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53%의 반대로 유로화를 거부했는데 지금은 51%가 찬성이다.

거기에다 2004년까지 동유럽 10개국이 EU에 가입한다. 그들의 환율은 유로에 연동돼 있다. 아프리카의 프랑스 경제권도 유로랜드로 연결된다. 미국인들은 유로의 유통이 달러가 주도하는 국제금융질서를 전혀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같은 학자는 유로의 영향은 심리적인 것에 그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유로랜드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6%, 국제교역의 20%를 차지하는 경제권이고, 올 상반기의 국제채(國際債) 발행에서 유로화가 36%를 차지한 것(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은 앞으로 자본조달 수단(기채통화)에서 달러에 대한 위협이 커질 조짐이다.

헌법을 가진 유럽 연방정부 같은 것의 출범 없이 단일통화를 채택한 것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실험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국가와 정부의 역할과 존재가치가 새삼 강조되는 시기에 주권의 상징인 제나라의 통화를 포기하는 것은 불안한 실험이다.

*** 다양성속 동질성 길러내

국가와 민족간의 우호 및 이해를 증진해 전쟁을 막아보자는 취지로 창안된 국제어 에스페란토가 실패한 것은 그 인조어(人造語)가 민족의 문화와 전통과 정서를 담아낼 수 없는 추상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다. 통화가 상품거래와 결제의 수단 이상으로 민족의 문화.전통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미국인들이 낙관하는 대로 유로는 심리적인 파문으로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삶을 얻은 잡다한 인종들은 기독교문명을 공통의 배경으로 삼아 카롤링왕조와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합스부르크왕조의 지배나 영향력 아래서 싸움과 화해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다양성 속의 동질성을 길러내는 지혜를 충분히 터득했다.

유로에 대한 세계의 반응은 대체로 회의적이기보다 긍정적이다. 유로를 하나의 문명의 현상으로 볼때 비로소 유로라는 국제통화의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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