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4년전 크리스마스

중앙일보

입력

메리 크리스마스.

4년 전 오늘을 기억하십니까.

난생 처음 겪는 외환위기 속에서 맞았던 성탄절을. 국가부도.대량실업.줄도산의 공포 속에서 다들 잔뜩 움츠린 채 맞았던 성탄절을.

그날 0시를 조금 지난 시각, 많은 사람들이 TV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큰 '성탄선물'이 하나 전달됐습니다.

"날 닮지 마세요,아르헨을"

미국 등 선진 13개국이 80억 달러,국제통화기금(IMF)이 20억달러, 해서 모두 1백억달러의 긴급 자금을 앞당겨 한국에 지원하겠다는 발표였지요.

바닥 나기 직전이었던 외환보유액은 이 때를 기점으로 하락세를 멈추었고 외국은행들도 돈 빼가기를 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고 한국은 국가부도를 간신히 면할 수 있었습니다.

4년이 지난 오늘, 그때의 암울함과 긴박함이 새삼스럽지요□

한데 아르헨티나는 우리와 사뭇 다르군요.

1970년대, 80년대에도 외환위기를 겪더니 올해 다시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1천3백20억달러의 외채를 당분간 갚지 못하겠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말이 좋아 '당분간'이지 이런 '배 째라'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크게 다릅니다.

한국은 일시적으로 자금을 지원해주니 다시 벌어 다 갚았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유동성 위기'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상환불능 위기'입니다. 자금지원만으로는 다시 경제를 일으켜세우지 못하는 것이지요. 정치불안.외채의존.구조조정실패 등 때문이지만, 특히 만성적 재정적자가 큰 요인으로 꼽힙니다.

중남미국가 스스로도 한국은 다르다고들 말합니다. 98년 초 멕시코로 그네들의 외환위기 극복과정을 취재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산업은행 부총재격인 인사와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던 참에 그가 붙잡았습니다.

"뭐 하나 안 물어본 게 있지 않나."

"……혹시, 멕시코로부터 한국이 본받을 점 말인가."

"하하, 그렇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다 물어보던데."

"글쎄, 지금 물어본다면."

"멕시코로부터 한국이 본 받을 점은 없다.한국은 멕시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한국은 멕시코와 많이 다릅니다. 아르헨티나와는 더 다릅니다.

대신 아르헨티나의 경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닮지 말아라. 우리 식으로는 안된다. 우리도 한 때는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었다." 자, 이런 점에서 지금부터 우리가 미리 미리 걱정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재정입니다.

4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가장 큰 변화는 거대한 민간 빚이 거대한 공공부문 빚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내년 정부예산이 1백11조원 규모인데 공적자금 원리금 갚을 것만 내년에 9조7천억원, 내후년에 27조5천억원입니다.

여기다 정부는 건강보험 적자요인을 더 키워놓아 앞으로 5년 동안 20조6천억원을 예산에서 건강보험에 넣어야 합니다. 막대한 적자가 뻔한 각종 연금도 고칠 생각을 않고 있습니다.

재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을 한꺼풀 벗기고 들어가보면 거기엔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 편하게 일하면서 더 많이 받으려는 국민정서, 감당하지 못할 복지수요 등의 근인(根因)들이 있습니다.

건전 재정 선물 넘겨줘야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들 아닙니까.

바로 아르헨티나가 그랬습니다. 다만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훨씬 더 지나치게, 대를 이어가며 그리하다 보니 '유동성 위기'가 아닌 '상환불능 위기'를 맞는 것이지요.

아르헨티나를 보며 4년 전 크리스마스 때 우리가 받았던 재앙과 선물을 다시 생각합니다.

경제위기는 아직도 다 극복되지 않았으며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건전한 재정을 선물해야 한다고. 메리 크리스마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sg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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