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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 & 이범수 '양아치' 견습생이 되다

중앙일보

입력


배우를 지켜보는 재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작품이 바뀔 때마다 기막히게 캐릭터 변신에 성공하는 그 변화무쌍함을 즐기는 것. 또는 누구도 범접 못할 카리스마의 한결같음에 매번 감탄하는 일. 물론 이 두 가지 재미를 다 선사할 수 있는 배우는 국내외를 통틀어도 극히 드물다. 장혁과 이범수. 이들은 과연 어느 쪽일까?

장혁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미지의 경계들을 잘 넘나들고 있는 쪽이다. GOD의 뮤직 비디오에서 처음 눈에 띄었을 때(자장면을 좋아했던 어머니의 아들이 바로 그다)부터 <학교>와 <햇빛 속으로>까지, 그의 이미지는 강한 눈빛만으로 백 마디의 대사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는 고독한 터프가이였다.

그리고 어느 날 <왕룽의 대지>에서 꼴통 짓만 하는 시골 청년 봉필이로 변신했다. 자기 이름을 “휘일∼”로 소개하며 건들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잘 어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영화 <화산고>에서는 장난기 가득한 절대 고수로 등장했고, 현재 촬영 중인 좰정글 쥬스좱에서는 아이큐 두 자리 수에 가까운 천진난만한 양아치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큰 무리수 없이 조금씩 운신의 폭을 넓혀 온 케이스다.

반면 이범수는 고정된 이미지로 성장했다. 10년 전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한국 영화상 가장 귀엽고 웃기는 악역이었다는 <하면 된다>의 캐릭터까지, 그는 성급한 제스처와 신랄하게 비속어를 쏟아내는 개성 있는 코믹 배우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물론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 어떤 배역이든 맡겨만 주면 잘할 수 있다. 꽃미남만 멜로가 가능한 것은 절대 아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데, 그 억울함이 이해도 된다. 8년간의 무명 시절을 벗어난 <태양은 없다>에서 아줌마 퍼머 머리가 눈에 쏙 들어왔다고, TV 오락 프로그램 <동거동락>의 히로인이었다고 해서 그게 전부가 아닌데 좀처럼 사람들은 그 ‘코믹한’ 이미지를 벗어날 기회를 안 준다.

위안이 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한국 영화에는 역량을 잘 갖춘 개성파 배우가 드물다. 그래서 그 부족한 부분에 그가 계속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병신, 지랄하고 자빠졌네”(우정 출연했던 <번지점프를 하다> 중)라는 대사를 그만큼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우? 흔치 않다.

한겨울 바닷가에서 옷을 벗다

시속 120∼140킬로미터로 7시간을 달려 도착한 거제도의 덕포 바닷가는 인적이 드문 작은 해수욕장이었다. 배도 몇 척 없는 시골 바닷가에 덜렁 두 개뿐인, 이름만 창대한 여관 ‘덕포 비치 호텔’과 ‘고래등 호텔’에 하루 밤새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이유는 영화 <정글 쥬스> 촬영 스태프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었기 때문.

<정글 쥬스>는(조민호 감독) ‘스무 살 메이드 인 청량리, 100% 프레시 양아치’들의 이야기다. 18년 동안 청량리 안에서만 살고 놀았던 스무 살 양아치 기태(장혁)와 철수(이범수)가 우연한 기회에 마약을 손에 넣고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와 좌충우돌하는 내용이다.

일요일 아침, 갑자기 수은주가 0도 가까이 떨어지면서 바닷바람이 거센 거제도의 아침 날씨는 한겨울을 방불케 했다. 중천에 뜬 해도 변덕쟁이 처녀 가슴마냥 제 갈피를 못 잡고 잔뜩 흐려 있다.

‘프레시 양아치’ 영화이니만큼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하지 않으면 영화 컨셉트상 촬영을 안 한다는 것이 감독의 고집이라 배우와 스태프들은 모처럼 여유 있는 하루를 맞게 됐다. 벌써 신나게 족구를 한판하고 땀으로 흠뻑 젖은 이범수, 검정 롱 파카 안에 잔뜩 몸을 웅크린 채 햇살을 좆아 바닷가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장혁.

조용한 초겨울 바닷가에서 오롯이 쉬고 싶은 두 남자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인터뷰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일요일 정오 스케줄에 끼어들기로 했다.

햇살만 좋았다면 오늘 영화 촬영 장소였을 언덕 위 폐쇄된 놀이동산에서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놀이동산의 울긋불긋 유치한 풍경이 스산하면서도 어쩐지 코믹해서 어설픈 양아치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사진가는 이왕이면 의상도 영화 속 캐릭터에 맞게 바꿔 입자고 제안했다. 산뜻하게 리바이스 엔지니어드 블랙 진 바지에 블랙 셔츠를 입고 있던 이범수가 잠시 머뭇거리는 눈치.

“내 것은 지금 그거밖에 없는데…” “그게 어때서. 색깔 좋잖아.”
프로듀서의 부추김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범수는 빨간 7부 바지에 ‘아메바(페이즐리) 무늬’ 남방 셔츠, 오렌지색 퓨마 스니커즈에 머리는 탈색한 금발이었다. 정말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찬란하고 요란스러웠다. 찢어진 빈티지 진에 로커의 얼굴이 역시 현란하게 프린트된 슬리브리스 셔츠 차림의 장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

“(장혁) 잔뜩 멋을 내긴 냈는데 어색하고 촌스러운 패션. 이게 우리 영화 의상 컨셉트거든요. 지금은 그래도 멋진 축에 끼는 거예요. 한탕 하기 위해 나름대로 멋을 부린 나이트 의상이거든요.”

“(이범수) 돈을 벌기 위해 기태와 철수가 짜낸 묘안인데, 나이트 클럽 가서 남한테 시비 걸어 잔뜩 두드려 맞은 다음 병원비 뜯는 거죠.(웃음) 기태와 철수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이런 식이에요.”

“장혁 씨 옷은 그래도 괜찮은데, 범수 씨 옷은 정말 촌스럽네요.”
“(장혁) 어, 모르시는 말씀. 나이트 클럽 가서 보면 저 아메바 무늬 남방 조명발 죽여줘요.(웃음)”

영화 속 캐릭터 그대로 가자는 말에 꼼꼼하게도 드러나는 맨팔에 즉석에서 문신(正生正死. 기태가 속한 조직의 표어다)을 그려 넣고 콧등에 반창고까지 붙이는 열성을 보인 장혁. 하늘을 배경으로 넣기 위해 롤러 코스터 선로를 따라 위험스러운 위치까지 갔던 이범수. 모두 살을 에이는 차가운 바람에 여름 옷을 입고도 유쾌한 표정이다. 영화 촬영 현장에 가보면 알겠지만 배우들에게서 인터뷰를 위한 유쾌한 매너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둘의 적극적이고 즐거운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바닷가로 내려와서도 촬영은 계속됐다. 물론 두 배우는 여전히 짧고 얇은 옷차림으로 바닷바람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 그저께부터 감기 기운이 있다는 장혁은 코까지 빨개지고, 이범수의 얼굴도 발갛게 변해 있었다. 순전히 기자 입장에서 나온 발상이지만 말이라도 하면 나을까 싶어 턱을 덜덜 떨면서도 질문을 계속 했다.

“고등학교 때 양아치 아니었어요?”
“(장혁) 저나 형이나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뭐.(웃음)”
“(이범수) 저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어요.(웃음) 예전에 어느 분이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대학 졸업했다니까 놀라더라구요(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 반장이었는데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죠. 그런 거 있잖아요. 공부하기 싫은 날 반장이 앞장서서 놀자고 일 꾸미는 거. 우리 반은 유난히 체육 시간이 많았어요.(웃음) 저는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영웅이었어요.(웃음)”

“혁이 씨한테는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친구들이 있을 법한데.”
“(장혁) 저기 있잖아요(영화 스태프처럼 보이는 또래의 남자를 가리킨다). 부산에 자기 일도 있는데 거제도에서 내가 촬영 있다니까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서로 얼굴을 못 보니까.”

“고등학교 때 싸움도 잘했을 것 같은데.”
“(장혁) 짱은 아니었지만 싸움을 잘하긴 했어요.(웃음) 저 친구한테만 유일하게 져봤죠(친구는 그리 우락부락해 보이지 않았다). 저래 보여도 고등학교 때 육체미 선수였어요(장혁도 중학교 때 마라톤, 고등학교 때 기계체조 선수였지만 종목상 역부족?). 참, 친구 이름 꼭 적어주세요. 안 그러면 삐져요.(웃음) 이름이 이기원이에요.”

매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배를 쫄쫄 굶겨가며 계속된 인터뷰는 오후 세 시가 다 돼서 끝났다. 따뜻한 온돌 아랫목에 몸을 녹이면서 얼큰한 매운탕으로 시작한 점심 식사.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왕성한 식욕을 발휘했는데, 영화가 아닌 실제 상황에서 멋진 남자 배우들이 “아줌마 여기 공기밥 추가요”를 외치는 풍경은 꽤 귀여웠다.

“10월부터 지방 촬영을 했다는데 기억나는 장소는?”
“(이범수) 부산 자갈치 시장이요. 가자마자 물에 빠지는 신부터 찍었거든요.”

“(장혁) 제가 부산에 살아서 아는데(그는 초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 유년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모두 부산에서 살았다), 자갈치 시장 물 정말 더러워요. 생선 찌꺼기들이 다 모이거든요. 옛날에 친구들이랑 싸울 때도 정말 의절하겠다 결심한 친구는 그 물에 빠뜨려버려요.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죠?”

“무대가 청량리 창녀촌이라는데 정말 아가씨들이 예쁘던 가요?”
“(장혁) 글쎄요. 화장했을 때랑, 안 했을 때랑 너무 달라 보여서.”

“(이범수) 그곳은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가 일하는 시간이에요. 우리는 낮에 촬영을 했기 때문에 부딪칠 일이 거의 없었어요. 이런 일은 간혹 있었죠. 창녀로 나오는 우리 연기자들이 야한 옷 입고 거리를 왔다갔다하니까 헷갈리는 사람들의 해프닝.(웃음)”

“<정글 쥬스>에 대한 코멘트를 하라면?”
“(이범수) 기태와 철수는 청량리를 안방처럼 누비는 ‘견습 양아치’들이에요. 원체 고민이라는 걸 안 하는 인물들이라 그들이 벌이는 해프닝은 늘 천진난만하고 귀엽죠. <정글 쥬스>는 악의가 없는 악동들의 좌충우돌 이야기예요.”

“(장혁) 양아치, 청량리, 창녀, 마약, 조직 이런 요소들이 섞여서 즐겁게 해피엔딩하지만 웃기만 하는 코미디 영화는 아니에요. 주인공들의 코믹한 캐릭터 안에는 인간적인 삶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고, 우울한 청춘일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실도 놓여 있죠. 그래서 삶이 참 씁쓸하다는 무게감도 느끼게 돼요.”

“(이범수) 관객을 웃게 만드는 데,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게 중요한 문제예요. 응원단장처럼 요란하게 웃음으로 몰아부치기만 하면 관객들은 포복절도하게 웃다가도 정작 영화가 끝나면 허탈해하거든요. 수위 조절을 잘하고 웃음 이후까지도 계획이 서 있어야 멋진 코미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점심 식사를 하자마자 서울행 채비를 차리는 우리에게 장혁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재미있었는데 소주라도 한잔 하면서 더 있다 가시죠. 지방 현장에만 있었더니 정말 사람이 그리워서요. 난 가끔 ‘오빠 생각’이라는 동요도 부른다니까요.(웃음)”

소주 한잔? 그럴 수 있었다면 이 두 남자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만으로도 이들의 소탈하고 정직한 모습을 아는 데는 충분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말도 많고, 개구쟁이 소년처럼 익살도 잘 부리던 장혁, 예상했던 것만큼 재치 있게 웃음을 선사하지만 꽤 말을 아끼면서 생각을 많이 하던 예민한 남자 이범수. 내년 봄 영화 <정글 쥬스>가 개봉한 후라면, 두 남자가 더 많은 이면을 가진 배우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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