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이상민 이지스의 희망봉

중앙일보

입력

3년 전 프로농구 삼보 엑써스의 허재(36)가 펄펄 날던 시절이다.모두들 허선수를 대신할 선수는 이상민(29.KCC 이지스)밖에 없다고 말했다.

농구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싸움이 붙었다.1대1로 맞붙으면 누가 이기겠느냐를 놓고 언성이 높아졌다.

유재학(SK 빅스)감독이 이선수의 우세를 점쳤다."이선수의 수비력이 더 강하므로 허선수가 많은 득점을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긴 이때만 해도 허선수는 한골 먹으면 두골을 넣는다는 배짱으로 농구를 했다.

이지스 신선우 감독의 의견은 달랐다."상대가 누가 됐든 허선수가 이긴다. 이선수에게는 허선수 같은 일기당천의 기백이 없다"고 역설했다.

이선수를 '오빠부대'의 환호성에 취한 어린 선수라고 몰아쳤다.

농구인들의 평가가 어찌 됐던 이번 시즌 이상민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이제 이선수는 더 이상 코트의 귀공자가 아니다. 꼴찌팀 이지스에서 가장 힘겨운 일을 도맡고 있는 막일꾼일 뿐이다.

상대팀에 걸출한 슈터가 있으면 이선수가 수비한다. 그러다 보니 체력이 많이 소모되고 파울이 많아진다. 상대팀 가드가 단신이면 골밑에서 1대1 공격을 시도한다. 그뿐인가. 때로는 외곽을 큰 폭으로 휘젓고 다니며 슈터 임무까지 감당한다.

이래도 투지 운운할 감독은 없다.신감독은 이선수의 체력 안배를 위해 기용시간을 조절하는 것으로 성의를 다한다.

이 또한 어려운 작업이다. 재키 존스가 부상으로 빠져있는 지금 이상민의 벤치행은 곧 이지스 전력의 급강하를 의미한다.

가장 잘된 경기는 지난주 빅스.삼성 썬더스전이었다. 공동선두를 달리던 두팀이 이지스에 나란히 패했다. 썬더스의 포워드 우지원은 이선수의 수비에 막혔고 빅스의 가드 최명도는 이선수의 골밑 공격을 막지 못했다.

이선수가 이처럼 힘겨운 시즌을 보내면서도 기록에는 기복이 없다. 지난 시즌까지 프로 통산 경기당 13.6득점·6.9어시스트, 올시즌엔 14.8득점·6.4어시스트. 정통 포인트 가드라고 보기 어려운 역할을 맡으면서도 어시스트 수를 유지하는 점이 놀랍다.

투지가 부족하다고 꼬집었던 신감독은 요즘 이선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너무 혹사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신감독은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낮춘다. "독이 잔뜩 올랐어요.잠깐 쉬게 하려고 해도 좀 싫어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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