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수의 세상탐사] 정부조직개편 잔혹사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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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호 31면

“외교와 통상이 분리될 경우 부처 간 조정이 유기적이지 않아 협조가 어렵다. 주요 회담 때마다 산업통상자원부 간부가 출장에 동행할 수도 없고, 결국 대외적으로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를 것으로 우려된다.”
박근혜 정부를 끌고 나갈 정부조직개편안(17부 3처 17청)이 발표된 지난달 하순이었다. 통상업무를 산업통상자원부로 넘기는 데 대해 어느 외교관이 울분 섞인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는 ‘외교부가 처절한 패배를 맞은 이유’도 적시돼 있었다. 외교부 내부의 폐쇄적 문화, 엘리트주의, 일부 예스맨(yesman) 간부들의 재승박덕(才勝薄德), 정치권 입장에 편승해 일신의 출세를 꾀하는 행태 등을 거론하며 뼈아픈 자기성찰을 다짐했다.

사적인 편지를 굳이 공개하는 건 제3자로서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아서다. 최근 만난 어느 중견 외교관은 “외교통상부에 대한 반감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외교부 후배들에게 ‘외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 얘기를 경청하라’고 틈날 때마다 주문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외교관들이 얼마나 자신감을 잃고 있는지 방증하는 발언이다. 김성환 장관이 뒤늦게 국회에서 강경 발언을 쏟아낸 것도 다분히 ‘조직 무마’ 차원이 강하다. 그는 37년간의 공직생활을 내걸고 “(통상기능 분리·이관은)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국가대표권, 조약체결권의 골간을 흔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통상교섭본부를 손본 건 뜻밖이었다. 국제무대에서 경제외교가 대세로 굳어지고 있어서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외국 정상과 회담을 할 때 경제통상 현안에 90%가량의 비중을 할애해 왔다고 한다. 요즘엔 재외공관 업무도 경제통상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아갔다.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에 진출한 한 주류업체가 2000억원 가까운 세금을 추징당했을 때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과 영국이 직·간접 압박을 가해왔다고 한다.

민주통합당도 통상교섭본부를 산업통상자원부로 옮기는 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최소한 국무총리 산하 독립기구로 둬야 비(非)산업분야 통상교섭과 함께 사회적 갈등 조정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원식 의원은 “(새누리당이) 박근혜 당선인의 철학과 경험만을 내세워 정부조직법개정안을 밀어붙이려 한다”고 토로했다. 한마디로 협상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조직개편을 둘러싼 볼멘소리는 이만저만 아니다. 세종시 이전까지 겹쳐 정부부처마다 술렁거린다. 부처 기능이 대폭 축소된 교육과학기술부는 물론 정보통신기술(ICT) 전담부처 설립을 기대했던 방송통신위원회도 내심 불만이다. 미래창조과학부에 ‘전담 차관’을 두는 게 차선책쯤 된다고 반응하지만 ‘새 정부에서 운용 성과를 봐가며 추가 개편을 하자’는 게 그들의 솔직한 속내다. 중소기업부 승격이 좌절된 중소기업청에선 “청와대 경호실장도 장관급인데 국무회의에도 참석 못하는 차관급으로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이익을 어떻게 반영하느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박근혜 당선인이 정부조직을 자신의 국정철학과 비전에 맞춰 개조하는 건 불가피하다.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한국 정치현실에서 일종의 통치권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1987년 직선제 이후 역대 정권이 정부 부처들을 뗐다 붙였다 반복해도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인 이유다. 가장 과격하게 손댔던 김영삼(YS) 정부에선 두 차례의 조직개편·행정개혁을 단행해 관료주의를 뿌리뽑으려 했다. 박근혜 당선인의 이번 개편안도 YS 시절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년의 시차가 있지만 정부조직개편 잔혹사는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에 주문하고 싶다. 무엇보다 정부조직개편의 역사를 좀 더 성찰하면서 국민적 합의를 모아나갈 절차를 밟았으면 좋겠다. 부처마다 터져 나오는 불만과 항변을 ‘부처 이기주의’라고 몰아세우며 권력의 힘으로 찍어 누를 게 아니다. 국회에서 여야 대화를 통해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야 개편과 통합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

또 하나 있다. 과거권력과 미래권력의 연장선상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힘으로 밀어붙일 경우 내일 다시 힘으로 뜯어고치는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길이 없다. 역대 정부도 취임 초엔 ‘현재 권력’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과거권력으로 내려앉은 순간 차기 정권에 의해 ‘혁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이 보름 남짓 남았다.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할 때이지만 서두르지 않는 게 더 현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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