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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맥아더의 서랍없는 책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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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 나란히 부실기업으로 전락하면서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기아자동차와 한보철강. 4년여가 지난 지금 두 회사는 너무나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기아차는 5일 "지난달 6만1천여대를 수출, 월간 실적으로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97년 이전보다 더 좋은 기업으로 거듭난 것이다.

*** 한보 매각 미루다가 낭패

그러나 한보철강은 여전히 주인도 없이 표류하고 있다. 충남 당진의 1백20만평 부지에 현재 가동 중인 곳은 A지구 중에서도 봉강공장뿐이다. 나머지 A.B지구 공장들은 가동중단 또는 건설중단 상태다. 사실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부도 직후인 97년 여름 포항제철.동국제강이 '2조원에 사겠다'고 제의했다. 이미 세차례에 걸친 공개입찰이 유찰돼 대안도 없는 상태였다. 채권단은 그러나 "회계법인이 평가한 한보 자산가치가 4조9천억원인데"라며 거부했다.

정치권도 매각 결렬에 한몫 했다. 여러 의원들이 "정부가 포철의 한보 인수계획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포철이 방만하게 운영된다""수의계약은 비자금 조성 목적 아니냐"고 뒷다리를 잡았다.

99년 초 동국제강이 단독인수에 나섰을 때 거의 마무리되는 듯싶었으나 막판에 결렬됐다. 당시 제시액은 1조7백억원이었다. 그 뒤 미국 네이버스 컨소시엄이 5천억~6천억원선에 인수의사를 밝혔으나 이마저 결렬됐다.

자산관리공사와 채권은행들은 지난달 30일 최종 국제입찰을 실시, AK캐피털을 조건부 인수후보로 선정했다. 자산관리공사는 "이번에는 반드시 판다"는 각오여서 팔릴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매매가격은 네이버스 때 수준을 넘기 어려울 전망. 3년 전 2조원에 팔 수 있었는데 설비 녹슬고, 종업원들 고생한 것까지 따지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기아차를 현대차에 팔 때에도 국내 자동차산업의 독과점 우려, 부채 탕감에 따른 헐값매각 시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질질 끌었다면 가뜩이나 공적자금에 멍든 우리 경제에 또 얼마나 부담이 됐을까.

최소 70억달러의 자산가치가 있다는 대우차. 이 회사엔 99년 8월 워크아웃 이후 지금까지 3조원의 자금이 들어갔다. 그러고도 그간 쌓인 영업손실이 1조3천억원에 이른다. 본전 욕심을 버리고 98년 GM에 팔았더라면, 아니 지난해 포드에 팔았더라면….

오죽하면 제프리 존스 주한 미 상의 회장이 "공짜로라도 넘겨 고용 유지하고 공장 가동하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을까.

정부는 4일 국무회의에서 추곡수매가 동결을 의결했다. 쌀값은 농민 후생.식량안보와 직결돼 이해는 간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고통이 더 커진다는 점.

우리 쌀값은 국제시세보다 5~6배 비싸다. 쌀 시장개방은 사실 90년대 초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때 이미 기정사실화됐고 다만 우리나라는 2004년까지 일단 유예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개방에 대비한 준비를 해왔어야 했다. 일본은 UR를 계기로 수매가를 계속 낮춰왔다. 대신 농업외 소득을 올리도록 여러 노력을 해왔다. 우린 10년을 허송세월했으니 대책이 없는 것이다.

*** 실패보다 失機가 치명적

정부는 2002년부터 주택공사와 토지공사를 통합하겠다고 98년 발표했었다. 통합이 어디 쉬운 일인가. 사전에 구조조정 등 여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시간만 보냈다. 그러다 최근 결국 보류됐다. 아마도 공기업 개혁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내년 양대선거를 앞두고 정치논리가 더욱 득세하고, 인기 없는 결정.책임 질 일은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럴수록 경제는 더욱 멍이 든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실패보다 실기(失機)가 더 치명적이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맥아더장군은 일본에서 군정을 시작하면서 집무실에 서랍이 없는 책상을 썼다고 한다. 결재서류를 서랍안에 묵힐 수 없도록 스스로 배수진을 쳤던 것이다.

민병관 산업부 차장 minb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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