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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밑의 「시발」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해방 이래 우리가 살아온 길의 이정표가 될만한 것을 생각해본다. 우선 원-원-원 하는 돈의 이름과 가치의 변천, 물가지수의 주행성적 곡선, 그리고 국가기본법의 거듭된 변모 드. 그러나 후진을 벗고 남과 같이 근대적인 생활을 해보자고 기를 써 오는 동안에, 우리와 함께 고된 생을 영위해온 반려에 「시발·택시」차가 있다. 59년 3월, 서울거리에 전쟁의 여운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감돌 때 9백여대의 「시발」이 등장했다. 「시발」이란 이름이 좋았고, 속은 「지프」차나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것을 싼 껍데기에선 역경속에서도 자립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재간있는 백성의 기상을 볼 수 있었다. 수명이 길리 없고 모양도 추악한 것을 두들겨 맞춰내기보다는, 날씬한 외제소형차를 들여오는 것이 국내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더 낮지않느냐는이론도 있었지만 「시발」에는 「시발」대로의 보람이 있고 자랑이 있었다.
그후 「시발」에 거의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준 것은 물론 「새나라」의 등장. 처음엔 일본차니 「닷도상」이니 하고 경원하고 애국심을 발휘해서 애써 털터리 「시발」을 찾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도 며칠 못사서 「시발」은 영락없는 후진의 상징으로 나가 떨어졌다. 가야금이나 뜯는 권번출신 노기가, 「동백아가씨」를 뽑고 「트위스트」를 추는 젊은 애들을 당할 수 없다.
「시발」이 걲은 수모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고, 「새나라」차와 「시발」차의 요금에 격차가 생겼을 때 그 극에 이르렀다. 화대를 덜받는대도 찾는 이가 없어, 덜한 화대를 더 내려 받게해달라고 진정을 하고 나서야할 때의 노기의 모습. 그러나 울밑에선 봉선화같이 처량해진 그 모습에서 봉선화같은 아름다움의 편린이나마 찾을 수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발」일 시발때의 추악을 그대로 고집해온 반면, 요사한 고객들의 안목은 크게 근대화해 버렸다는데에 「시발」의 비극이 있다.
9백여대가 5백여대로 줄어든 「시발」은 이제 어떻게 될까. 시발때의 재간과 자립의욕은 또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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