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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춤 즐기는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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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엔저 효과로 주문이 급속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시계·만보기 등의 계측기기를 생산해 유럽과 미국에 수출하는 일본 업체인 야마사(山佐) 시계계기. 이 회사의 일본 본사엔 요즘 해외 지점으로부터 이런 낭보가 이어지고 있다. 이 회사의 최근 수주 물량은 지난해 초에 비해 20% 이상 급증했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두 달 남짓 새 유로 대비 엔화 값이 20%가량 떨어지면서 영국·네덜란드·벨기에의 의료기기 업체가 더 싼 값에 물건을 댈 수 있는 일본 업체로 발주 물량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 회사 임원인 기무라 마사미(木村正美)는 “수출에 밝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엔화가치 하락을 밑거름으로 일본 기업이 활력을 되찾고 있다. 기대감은 주가에 먼저 반영됐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1일 기준으로 시가총액이 1조 엔(약 12조원)을 넘는 기업이 도요타 등 71개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집계(47개)보다 51% 급증했다.

 한·일 대표 기업의 시가총액 역전 현상도 나타났다. 닛케이에 따르면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의 시가총액이 현대중공업을 앞질렀고, 신일철스미킨과 포스코의 시가총액 차이는 7000억 엔(지난해 10월)에서 5000억 엔으로 좁혀졌다. 닛케이는 “동남아의 강재가공회사에서 일본 철강제품 구매 의뢰가 급증했다”며 “수주 경쟁에서 한국에 뒤져왔던 일본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되찾고 있다”고 전했다.

 대기업의 약진은 중소기업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파나소닉 등 대형업체에 내비게이션 시스템과 감시카메라 부품을 납품하는 사루와타리(猿渡)전기제작소 세키 가즈마사 사장은 “지난 연말연시는 최근 3년 사이 일이 가장 많이 몰린 시기였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의 부활을 바라보는 한국에선 경계론이 커지고 있다. 일본의 엔저는 단순히 통화가치를 낮춰 수출을 늘리는 데 머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11일 13조1000억 엔 규모의 경제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 안의 핵심은 1조8000억 엔에 이르는 연구개발(R&D) 투자다. 엔저로 시간을 벌면서 일본 제조업의 근본적 경쟁력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다. 아베 정부는 기업 지원을 위해 규제개혁위원회의 신설도 추진하고 있다.

 기업 역시 엔저를 발판으로 재도약 채비를 마쳤다.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샤프는 지난해 4분기 흑자(영업이익 26억 엔)를 기록했다. 다섯 분기 만에 적자를 흑자로 돌린 것이다. 파나소닉·도시바도 흑자 전환 행진에 동참했다. 엔저 영향도 있지만, 구조조정을 확실히 한 것이 큰 몫을 했다. 샤프는 본사 건물을 포함해 108억 엔 규모의 자산을 매각하고 인력을 10% 구조조정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엔저가 과거 엔저와 확실히 다른 점은 일본 정부가 작심하고 정책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전 국가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성장 총력전을 펴게 되면 한국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며 “20년 불황을 이겨낸 일본의 저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김현기 특파원,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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