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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혹은 형이상학적 SF

중앙일보

입력

영화와 철학의 ‘근접조우’가 이뤄진 후 둘은 꽤 가까운 사이가 됐다. 책 제목에 나란히 등장한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으며 그 둘을 짝지으려는 주위의 성화도 유별났다.

하지만 둘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혹한 시련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다. 영화는 ‘오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철학은 ‘오락’을 비천한 것이라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둘은 과연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영화에 대한 철학적 각주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와 철학을 묶어보려 시도했고 이제 그 리스트에 또 한 권의 책이 추가됐다. 철학자 이정우씨의 『기술과 운명』(한길사)은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바이센테니얼 맨’ ‘매트릭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5편의 SF영화를 철학적으로 읽어낸 책이다. 너무 뻔한 기획에 너무 많이 알려진 영화라 책장을 덮으려 할지 모르겠지만 『기술과 운명』은 그간의 책들과는 남다른 데가 있다.

“영화를 다룬 책이 굉장히 많죠. 하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어떤 철학이론을 정한 후 그 이론을 영화에 투영해보는 식이에요. 저는 반대로 했어요.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 속에서 철학을 끄집어내려 한 거죠. 영화에 좀더 충실한 철학적 글쓰기를 해보자, 그게 제 생각이었어요.”

이정우씨의 말처럼 『기술과 운명』은 마치 영화의 철학적 각주처럼 읽힌다. 영화에 충실하되 철학적 핵심은 놓치지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문밖의 젊은이들에게 디스켓을 꺼내주는 순간을 기억하시는지. 아,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에서 그 디스켓을 꺼낸다고? 맞다.

그렇다면 그 책의 제목은? 바로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그 중에서도 ‘니힐리즘’장이다. 이런 사소한 단서야말로 영화 전체를 설명해준다. 이정우씨는 이런 단서들을 발견하기 위해 수없이 영화를 보고 분석했다.

“영화를 자주 보진 못해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좋은 SF영화라고 하면 찾아가서 보는 편이죠. 책을 쓰기 전에 책 속의 영화를 두 세 번씩은 봤고 책을 쓰면서 꼼꼼하게 다시 보기 시작했죠. 영화를 보면 볼수록 SF와 형이상학은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아요.

대체로 ‘형이상학은 고상한 것이고 SF영화는 단순한 오락물’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데 꼭 그렇진 않아요. 좋은 SF영화도 굉장히 많거든요. SF와 형이상학의 가장 큰 공통점은 경험이나 과학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상상하고 그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을 바탕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성찰하는 거죠.”

이정우씨가 네 편의 영화를 묶은 것은 그 영화들이 한 가지 주제로 집결되기 때문이다. 바로 정체성의 문제다. ‘블레이드 러너’는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공각기동대’는 마음 속에 채워져 있는 정보와 정체성의 문제, ‘바이센테니얼 맨’은 인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로봇의 정체성, ‘매트릭스’는 가짜 세계에 살다 진짜를 알게 된 인간의 정체성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많은 부분은 현실로선 이뤄지기 힘든 가상의 설정이다. 하지만 가짜와 진짜의 구분,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없는 SF영화에서 우리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이미지들을 본다. 이정우씨는 사이버펑크적인 미래세계에서, 즉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바뀔지를 캐묻는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정우씨는 영화를 부지런히 쫓으면서, 답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그 속의 이미지를 분석한다.

사이버펑크에서 어떻게 철학을 발견할 것인가?
“제가 쓴 책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책의 외형에 신경을 많이 써요. 강의록이냐, 에세이냐, 아니면 이번처럼 영화와 접목한 것이냐, 이런 것들 말이죠. 하지만 그런 외형적인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어려운 논문을 쓰든 에세이를 쓰든 영화를 분석하든 제 생각을 일관되게 전개하는 거죠.”

어쨌든 『기술과 운명』은 글쓴이와 독자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 될 것 같다. 이정우씨는 자신의 생각에 사다리를 놓아 줄 영화를 발견했고,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는 영화를 통해 철학으로 쉽게 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얻었으니. (김중혁/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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