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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할아버지 인생 책에 담아 기쁨 주고 세대간 소통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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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글을 뒤늦게 배운 노인들을 위한 자서전 쓰기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노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천안지역 고등학생들이 나섰다. 어르신의 자서전을 직접 만들어 선물하는 이들의 재능봉사활동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강태우 기자

이연아(맨 왼쪽)·김동순(가운데)·하학순 할머니가 자서전을 써준 학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조영회 기자]

“내 인생이 한 권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게 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천안지역 어르신들의 지난 삶을 한 권의 책으로 펴낸 청소년들이 세대 간 소통이 단절된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평생 한글을 배우지 못한 어르신들에게 책을 쓴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재능봉사는 어르신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학생교육문화원에서 6년째 문해교육을 받고 있는 김동순(66)씨. 김씨는 죽기 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김씨는 글을 모른 채 한 평생을 살아 왔다. 평범한 가정의 육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무작정 친구를 따라 왕복 16㎞의 거리의 험한 산길을 다니며 교문만 바라보고 돌아왔던 어린 시절, 또래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 빨래터에서 동생들의 교복을 세탁하던 가슴 아픈 사연, 모든 집안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부모에게 반항 한 번 하지 못했던 가정환경, 글을 몰라 시집을 가서도 고생했던 기억, 궂은 일을 하며 자녀 뒷바라지를 했던 주부시절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는 응어리였다. 반면 행복했던 추억도 많다. 친구들과 해지는 줄 모르고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고 비석을 치던 추억들, 저녁이 되면 마을 여기 저기 울려 퍼진 사물놀이패의 흥겨운 가락, 동생들과 개울가에서 멱을 감았던 시절, 세 자녀를 키우며 행복했던 날도 있다. 그는 70을 바라보는 최근에서야 글을 배웠고 수 차례 책을 쓰려고 시도했지만 희미한 기억을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같은 사연을 들은 천안지역 고등학생들이 수개월의 작업 끝에 김씨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냈다. 천안 두정고 도서부에서 활동하는 김나현(3년)·장원재(3년)·황규연(3년)·김대범(3년)·박주호(2년) 학생. 이들은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반납하거나 서적을 정리하는 것 이상으로 보람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충남학생교육문화원의 ‘어르신 자서전 써 드리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지난해 5월 이렇게 학생들과 김씨와의 인연은 시작됐다. 첫 만남은 서먹했지만 할머니의 정겨운 말투와 푸근한 인심에 이들은 금새 친해졌다. 학생들은 자서전 제작을 위해 매달에 한 번 이상 할머니와 만나며 그의 인생 이야기를 경청했다. 메모로 채우지 못한 부분은 녹음기를 동원해 채워나갔고 각자 집에 돌아와서는 글로 다듬는 작업을 반복했다. 평소에도 할머니와 수 차례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하며 궁금했던 점을 물으며 수정, 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8개월 간의 과정을 거치며 김씨의 소원인 자서전은 완성됐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송다영(2년)양은 외할머니의 자서전 제작에 참여하면서 그 동안 가졌던 선입견을 버리고 할머니와 더욱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내성적인 성격의 다영이는 엄하게 자신을 대했던 외할머니가 무서워 마음 편히 대화하기가 항상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중 지난해 초 용기를 냈다. 할머니의 자서전을 친구들과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에 할머니를 설득했다. 외할머니(하학순·76)는 22년 전 30대의 큰 아들을 잃고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는 사랑하는 남편 마저 세상을 떠나 보내면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는 80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낸 적이 없다. 다영이는 이런 할머니의 인생에 희망을 주고 싶었다. 자서전 제작 요청을 거절했던 할머니도 결국 손녀의 뜻을 받아들였고 수개월 간에 걸친 작업 끝에 할머니의 인생을 자서전에 오롯이 담았다. 책이 출판되자 할머니의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손녀를 대하는 행동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김씨와 하씨처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자서전을 갖게 된 노인들은 지난해에만 모두 17명. ‘자서전 써 드리기’는 단순히 학생들의 열정과 노력에 의한 결과물만이 아니다. 굳게 닫혀 있던 세대 간의 벽을 허물고 공감과 소통을 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은 자신들이 맡은 자서전의 주인공들과의 인연을 계기로 향후에도 함께 식사하고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지내기로 약속했다.

 제작에 참여한 김나현양은 “자서전을 쓰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고 인터뷰 후에 책을 쓰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됐다.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움의 소중함을 알았고 우리 할머니는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 주변의 어르신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내며 어른을 공경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학순씨는 “굴곡 많은 나의 인생을 책으로 만들어 준다는 건 고사하고 누구도 나의 곁에서 한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16년을 외부와 연락을 끊고 홀로 살아왔는데 자서전을 통해 인생을 정리하고 새 희망을 얻게 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았다. 평생 마음에 묻어 두었던 응어리를 책을 통해 풀어 버리게 됐고 손주와 같은 어린 학생들과 말동무가 돼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위안도 받았다. 학생들과 함께할 수 있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충남학생교육문화원 관계자는 “학생들의 자원봉사로 탄생한 자서전은 어르신과 후손들에게도 좋은 기록이 되겠지만 근현대사에 대한 생생한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며 “예쁘게 만들어진 자서전에 학생들의 소감도 함께 수록해 자원봉사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 각 학교에 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어르신 자서전 써 드리기=‘어르신 자서전 써 드리기’는 충남학생교육문화원이 지난 2011년부터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청소년에게는 기성세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통해 따듯한 인성을 기를 수 있는 경험을 주고 노인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존감을 높이고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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