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새 두 번째 총수 공백 맞는 SK … 비상경영 돌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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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법정구속된 31일 서울 서린동 SK 본사는 하루 종일 무거운 분위기였다. 직원들이 회전문을 통해 회사로 들어가고 있다. [김형수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법정 구속 수감된 31일 서울 서린동 SK 사옥은 오후 내내 깊은 침묵만 흘렀다. 사옥에서 만난 임직원들은 겉으론 큰 동요가 없는 듯했지만 하나같이 간간이 한숨을 내쉬거나 극도로 말을 아꼈다.

 법정에서 최 회장의 공판을 지켜본 몇몇 임직원은 서둘러 회사로 복귀해 밤늦게까지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실 전날까지도 그룹 내에선 내심 최 회장의 집행유예까지도 기대한 터라 충격의 파장은 더욱 컸다. SK 관계자는 “며칠 전까지도 최 회장이 사회적 기업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각종 강연에 나서는 등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와 이날 재판 결과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룹 일각에서는 재판 직전까지도 최 회장이 국내외를 오가며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친 게 되레 재판에 악영향을 끼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날 최 회장을 대신해 그룹 내 경영을 총괄 조율하는 김창근(63)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곧바로 비상경영체제로 돌입했다. SK그룹은 지난해 말 계열사별로 투자 등 독자적인 경영을 추구하되 최고경영자(CEO) 인사 등에 대한 권한을 최고의사결정기구(수펙스추구협의회)에 맡기는 방식으로 경영 체제를 손질했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덕에 당장 최 회장 구속에 따른 경영 공백과 혼란은 없을 것이란 게 SK 측 설명이다. 하지만 ‘오너 부재’의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본사에서 만난 SK 고위 임원은 “아직 2심 재판도 남아 있고 형이 최종 확정된 것도 아니지만 이번 판결로 임직원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그룹의 신인도에 악영향을 줄까 우려된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최 회장의 법정 구속으로 재계 3위인 SK는 또다시 ‘총수 부재’라는 시련을 맞게 됐다. 특히 최 회장은 재임 기간 두 번이나 법정 구속되는 불운한 경영인이 됐다.

 최 회장은 1998년 9월 선친인 고 최종현 회장의 뒤를 이어 SK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전문경영인이던 손길승(72·SK텔레콤 명예회장) 회장과 함께 그룹 경영을 맡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를 만났다. 2003년 3월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 분식회계를 지시하고 계열사 주식을 맞교환한 혐의로 기소된 것.

 같은 해 6월 재판부는 최 회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그는 3개월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그는 지인들에게 “하늘이 내린 시련”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최 회장은 구속 상태에서 경영권 박탈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외국계 자본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지분 14.99%를 사들이면서 그룹이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놓였던 것. 소버린이 주식을 처분하면서 한국을 떠날 때까지 ‘M&A 악몽’에서 벗어나는 데 2년이 걸렸다.

 이런 고초를 겪은 최 회장은 2011년 또다시 계열사 자금 횡령 의혹에 휘말리자 지배구조 개선과 계열사별 독립 경영에 공을 들였다. 지난해 도입한 수펙스추구협의회도 그런 구상 속에 만들어졌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최 회장은 지난해 말 그룹 회장직도 내놨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략적 대주주’로서 글로벌 성장과 차세대 먹거리 개발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그룹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으로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을 추대했다.

 SK 관계자는 “현재 수펙스추구협의회와 각 계열사 이사회가 계열사 임원 인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겉모습만 보면 SK는 이른바 ‘오너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호벽을 구축해 놓은 상태다.

 SK 고위 관계자는 그러나 “무엇보다 미래사업 발굴이나 해외시장 개척, 자원 개발 같은 굵직한 사업은 당분간 진행하기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2003년 첫 번째 구속 때와 달리 이번엔 그룹의 구심점이 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는 고 최종현 회장의 가신 출신으로 카리스마가 강했던 손길승 회장이 그룹을 장악하면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최 회장이 직접 주관해 온 SK의 사회적 기업 이미지에도 상처를 입게 됐다. 최 회장은 2008년 이래로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수익활동을 하는 사회적 기업 활동을 주도해 왔다.

글=이상재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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