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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인 “숙맥, 바보가 나에겐 멘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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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안진

삶은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남을 앞서고 이겨 먹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유안진(72) 시인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5년 만에 내놓은 산문집 『상처를 꽃으로』(문예중앙)에서 “허둥지둥 살지 말자. 어리석게 살자”라고 다독인다. “우리 삶에는 피 흘리는 경쟁만큼 용기 있는 포기와 해방과 자유와의 균형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3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숙맥이나 바보, 찌질이가 멘토”라며 “숙맥 같은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받지만 더 오래가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50여 년 전 일화를 털어놨다.

스승인 고(故) 박목월 선생과 설렁탕을 먹으러 갔을 때다. 감히 선생님 쪽에 놓은 소금 그릇을 달란 말을 못해 간도 되지 않은 설렁탕만 먹었다. 그런 그를 보며 박목월 선생은 ‘저리 숙맥 같으니 시는 잘 쓰겠구나’ 생각했다고 어느 글에서 밝혔다.

 그는 살면서 조금은 느슨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 산문만큼 적합한 글도 없다 했다. “시는 알레고리와 아이러니 등이 있어야 하지만 산문은 어머니처럼 편해요. 어머니가 고쟁이 바람으로 다녀도 괜찮은 편안함이 있잖아요. 모든 글이 다 산문, 수필이 되니까.”

 그러면서 헐거운 마음이 갖고 있는 장점은 홍시에 비유했다. “나이가 드니 마음도 약해지고 여려져 이 맛도 저 맛도 아니게 되네요. 독기가 없어진 거죠. 그런데 생각해요. 항상 땡감이면 맛있겠나. 땡감이던 시절을 지나 단감도 지나고 홍시가 돼 흐물대는 거라고.” 따뜻한 그의 시선을 거쳐 나오는 삶에 대한 통찰은 말랑한 홍시 같았다. 한 입 베어물면 입 안에서 녹아내리 듯 읽는 이의 마음에도 그렇게 슬며시 녹아서 번졌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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