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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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철환
JTBC 대PD

JTBC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의 시청률이 고공행진 중이다. 두 자리 숫자가 눈앞에 닥쳤다. 지상파 기준으로 보면 ‘그 정도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며 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0.1의 가치를 온몸으로 겪으며 배운 자들에겐 눈물이 묻어나는 숫자다.

 작가의 내공이 빚은 예견된 결과지만 모두가 박수를 보내진 않는다. 채널이미지를 문제 삼으며 여전히 시비를 건다. “결국 돈의 힘이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맞는 말도 아니다. 김수현 작가를 돈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가. 수없이 만나 진심을 보인 후 얻어낸 한 마디. “어렵게 태어난 신생방송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네.”

 첫 회 시청률이 나온 후 작가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종편 담장이 높네요.” 바로 답신을 보냈다. “담장을 부수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담장을 타고 오르는 거죠.”

 이번 주엔 큰아들(유동근)의 주사가 담벼락을 탔다. 평소 아내(김해숙)를 훈육주임으로 모시던 그가 독기를 내뿜는 장면이다. 저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욕설이 이어졌다. 아내는 그걸 녹음해서 시아버지(이순재)께 이른다. 문제는 술이 깬 후.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빌지만 아내는 냉랭하다.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그런 맘이야 사라질 성싶지 않기 때문이다.

 맞다. 술의 힘을 빌렸지만 그건 평소 그의 장독에서 익어가던 감정의 진액이다. 교훈은 뭘까. 행복이란 게 지속 가능한 평화라고 믿는다면 말은 반드시 가려서 해야 한다. 마음속 원한은 원인부터 찾아 하나하나 차분히 풀어내야 한다. 그게 순서이고 도리다.

 김 작가의 드라마에는 오래된 것들의 향기와 풋풋한 비린내가 공존한다. 가족의 소중함과 더불어 약자에 대한 유별난 연민이 있다. 최근 작품일수록 그 경향이 뚜렷하다.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지겹다는 시청자도 더러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정겹게 들린다. 세상을 오래 지켜본 할머니의 사랑. 누룩 같은 노파심이란 그런 것 아닐까.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 중엔 이런 것도 있다. 김 작가의 작품에 대해 어떤 기자가 불륜 조장이라고 끈질기게 몰았다. 어느 날 드라마에 그 기자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사람이 아니라 멍멍이였다. 작가는 커튼 뒤에서 이 말을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특이한 제목들이 꽤 있다. 그중에서도 이건 여운이 남다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생각 좀 해보자.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아는 체를 했던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했다가 타인의 삶을 울적하게 한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대중문화계에 김씨 성을 가진 큰 누님이 세 분 계신데 가나다순으로 김수현, 김혜자, 패티김이다.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배우는 게 많다. 그러면서 반성도 한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 쉽게 말을 옮기는구나.” 변호인은 아니지만 내가 그 경우라도 억울할 것 같은 이야기를 하나씩만 해보자.

 김혜자씨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곤혹스럽다. “왜 당신은 가까운 이웃을 돌보지 않고 멀리 아프리카까지 가시나요.” 눈길 끌려고, 아니 인기 끌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는 어감이다. 조금만 헤아려보면 그게 아니라는 답이 나올 텐데 일부 사람들은 딱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 그녀가 답한다. “어떤 계기로 아프리카에 갔는데 눈앞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를 보았다. 그때 결심했다. 아, 남은 인생 이 아이들을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겠구나.”

 패티김씨는 돈 떨어지면 슬그머니 국내에 들어와서 공연하고 다시 출국한다는 게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한다. 본인은 거의 국내에 머물면서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다음번 팬들과의 만남을 항상 준비해 왔다는 거다. 무대 위의 마녀는 화려할 것 같은데 의외로 소탈하기 그지없다. 오랫동안 정체를 숨겨온 걸까. 아니다. 그 정도로 프로라는 얘기다.

 말이 많아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염두에 두자. 세상엔 안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하면 더 좋을 말도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다짐하자. 누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말 하는 게 싫다면 나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말 함부로 하지 말아야지.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