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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아버지처럼 김정은 전쟁준비 명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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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정은(얼굴)이 지난 26일 비밀회의에서 언급한 ‘국가적 중대조치’의 내용이 드러났다. 북한은 비공개에 부쳤지만 김정은이 회의에서 핵실험 준비를 비롯한 6개 항의 지시를 내린 사실이 대북소식통에 의해 밝혀졌다. 정부 당국도 베이징에서 나돌던 첩보를 토대로 사실관계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29일부터 이틀간 풍계리 핵실험장 등에 대한 점검을 완료한 뒤 핵실험을 실시하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한·미 정보당국과 대북 전문가들이 예상한 시점보다 훨씬 빨리 단행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당초 김정일의 생일(2월 16일)이나 박근혜 당선인의 취임식(2월 25일)을 계기로 핵실험이 이뤄질 것이란 게 대체적인 전망이었다.

 29일 0시를 기해 전군이 비상 계엄상태에 들어가고 전방부대와 평양, 그 주변을 방어하는 중앙급 부대에 전쟁준비 돌입을 명령한 점도 눈에 띈다. 1993년 3월 아버지 김정일이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며 1차 북핵 위기국면을 주도했던 걸 20년 만에 재연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당시 최고사령관이던 김정일은 국제원자력기구의 북핵 사찰 요구에 반발하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뒤 북한 전역을 전쟁준비 상태로 몰아넣었다.

 김정은은 핵실험으로 초래될 중국과의 관계 악화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정은은 회의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아직도 쓸모가 있다”며 “중국과의 관계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언론 동향에 유의하라는 주문도 했다. 김정은은 특히 “며칠 전 중국에 대해 비판한 건 너무 강했다”며 “반드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에 동참한 중국에 대해 북한 국방위가 25일 “큰 나라들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원칙을 저버렸다”고 비난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김정은의 핵·전쟁준비 관련 지시가 나온 이번 회의는 관영 조선중앙통신으로 개최 사실이 보도되면서 논의 내용에 관심이 쏠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유사한 회의를 김정은이 주관하고 사진까지 공개했다는 점에서다.

 회의에는 핵·미사일 개발을 총괄한 박도춘 당 군수공업 비서와 대미 외교를 책임진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등 대북제재 국면을 이끄는 7인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정은이 직접 회의에서 ‘중대조치’를 언급했다고 북한 매체들이 밝힌 만큼 어떤 식으로든 실제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정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당국은 북한이 이미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핵실험 준비와 우리의 계엄에 해당하는 비상사태에 돌입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29일 현재 전방부대의 움직임 등 특이 동향은 아직 포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당국은 김정일의 유훈에 따른 행사라고 강조해 온 노동당 4차 당세포 비서대회가 28일 시작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2007년 10월 이후 5년 만의 행사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고 전시체제 돌입을 아직 주민 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란 얘기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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