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진의 정치Q] '해남 워터게이트' 이정일 의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불법 도청으로 구속된 이정일 민주당 의원에겐 보물단지 같은 007가방이 있다. 깨알 같은 메모가 가득한 수첩 30여 개가 들어 있다. 각종 외교.의정.지역구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한쪽 공간엔 디지털 카메라.비디오.녹음기가 들어 있다. 가방만 있으면 언제.어디서든 자료 채취와 가공이 가능하다.

1948년 개원 이래 수천 명의 의원이 있었지만 이런 의정활동 휴대장치를 갖춘 이는 없었다. 한국 의원들의 취약점이 기록이라면 그는 이 분야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가방을 가지고 있던 그가 공교롭게도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도청사건에 연루됐다.

사건 자체는 한국 정치사에 남을 만하다. 92년 12월 대선 때 정주영 후보의 국민당 측은 부산 초원복국집을 도청했다. 지역 기관장 모임의 발언을 녹음한 이 사건으로 정국이 요동쳤다.

이 의원이 관련된 해남.진도 도청사건의 규모는 작다. 도청 내용이 공개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청기가 개인의 집안 깊숙한 곳을 1년 가까이 중계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일 수 있다.

검찰에 따르면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 후보가 크게 앞서가자 이 의원의 참모들이 도청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받아들였다. 심부름센터 직원이 열린우리당 후보 선거대책본부장의 집안에 고성능 도청기를 설치했다. 거실의 등나무 회전의자 방석 밑이었다.

71세의 홍두표(해남군 의원) 선대본부장은 1년 가까이 이 방석에 앉았다. 선거 때는 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불법적인 자금 집행도 논의했다고 한다. 홍씨는 "만약 우리가 이겼더라면 이 후보 측에서 도청 녹음을 들이대 우리는 감옥에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걸리는 거냐고 물었더니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하더라"고 했다. 홍씨는 "세상에 엉덩이 밑에 도청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떠들었으니…"라며 어이없어했다. 도청기는 2월 제거됐다. 72년 6월 미국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추진하던 비밀공작반은 상대당인 민주당의 본부가 있던 워터게이트 호텔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체포됐다. 닉슨은 사건을 무마하려 거짓말을 하다 탄핵에 몰렸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사무총장이던 이 의원은 검은색 넥타이를 맸다. "당이 죽을지 모른다"는 경계경보였다. 민주당은 두 달 뒤 전남지사 보선에서 기사회생했다. 그렇게 당에 기여했던 이 의원은 도청으로 당에 타격을 주고 있다. 007가방 안에 워터게이트 기록은 없었던 것 같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