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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비 엇갈리는 엔저 공습의 현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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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녹산공단에 있는 신한금형의 박시영 관리부장은 이달 중순 일본의 납품업체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엔화값이 계속 떨어져 손해가 크니 가격 조정에 협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올려주겠다’는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답답한 마음을 전하고, 엔화값이 계속 떨어지면 다음번 계약 때는 값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회사는 매출의 40%가량을 일본 수출로 올린다. 박 부장은 “금형제품은 수주에서 납품까지 3~4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린다”며 “지난해 하반기 100엔당 1400~1500원일 때 계약한 물량의 경우 지금 대금을 받으면 2억~3억원은 앉아서 손해를 보는 꼴”이라고 토로했다.

반면 엔저 현상의 덕을 보는 업체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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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서울 갈월동에 있는 여행업체 ‘여행박사’의 일본팀 사무실. 30여 명의 직원이 예약문의 전화를 받느라 분주했다. 엔저 현상이 나타난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일본 여행 예약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 이상 늘었기 때문이다. 주성진 일본팀장은 “얼마전 직원 한 명이 하루에 140통의 문의를 받았다”며 “일본 여행 성수기이기도 하지만 엔저 매력에 더 많이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기피 대상으로 낙인찍혔던 일본여행이 엔저로 힘을 받는 모양새다. 하나투어에 따르면 다음 달 일본여행 모집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에어텔 상품은 104%, 패키지 여행은 74% 급증했다. 엔화로 판매되는 호텔 예약은 증가율이 279%에 달한다.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돈을 푸는 정책으로 엔화가치 하락이 가속화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25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가치는 91엔대로 떨어졌다. 2010년 6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100엔당 1200원대가 무너진 원-엔 환율은 25일 1185원을 기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아베 총리가 엔화 약세를 노골적으로 용인하고 있어 당분간 엔저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엔저 파장은 한국 경제에 광범위하게 몰아치고 있다.

타격이 가장 큰 곳은 일본에 물건을 파는 중소 제조업체들이다. 대기업에 비해 환율 변동 대처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충북 충주에서 금형업체를 하는 최모(67) 사장은 “영업이익률이 10% 선인데 엔화값이 떨어지면서 손해가 20%가 넘는다”며 “일본 거래업체 사장에게 통사정도 했지만 잘 안 돼 수출을 안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신 내수와 동남아 시장 개척에 힘쓰기로 했다.

대형 유통업체들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롯데백화점 면세점은 최근 일본인 고객이 20% 정도 줄었다. 25일 롯데 면세점에서 만난 일본인 마쓰무라(松村·51)는 “업무차 한국에 올 때면 넥타이·김 등을 샀는데 엔화값이 떨어지면서 아무래도 덜 사게 된다”고 말했다. 이 면세점은 줄어드는 일본 손님을 잡기 위해 한류스타가 광고 촬영 때 입었던 옷과 소품을 대거 경품으로 내놨다. 일본 고객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여행권·숙박권을 주는 행사도 한다.

현대·기아차는 24시간 환율 모니터링 체제를 구축해 운영하고 결제 통화도 다양하게 바꾸고 있다. 기아차의 주우정 재무관리실장은 “원가구조 개선, 제값 받기 등으로 환율 변동에 대처하고 있다”며 “원화 강세가 계속되면 수출 차 가격 인상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유병규 전무는 “엔저가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는 업체엔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수입대체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정부·기업 모두 이번의 엔저 현상을 제품과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염태정ㆍ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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