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신사참배 日 국내여론도 싸늘

중앙일보

입력

지난 14일은 한.일 관계의 명암과 현주소를 실감케 한 날이었다.

이날 오전 주일 한국대사관에서는 지난해 '한.일 국민교류의 해'를 맞아 한.일 친선대사로 활동했던 여배우 후지와라 노리카(藤原紀香)씨에 대한 감사패 전달식이 있었다.

"양국 우호를 위해 더욱 노력하자"는 대화 속에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불과 두시간 후 벌어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는 그런 기대감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두 사건은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한 2001년 4월 이후의 한.일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관계가 좀 좋아질 만하면 느닷없이 신사 참배 소식이 날아들어 분위기가 썰렁해지곤 했다.

한국.중국의 비난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고이즈미 총리가 매년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데는 보수파의 지원을 얻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 참배 후 그는 진보.보수파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속 보이는 '양다리 걸치기'때문이었다.

진보적인 아사히(朝日)신문은 "2~3월에 출범하는 한국.중국 신정부와의 마찰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겠지만, 북핵 문제로 외교적 협력이 절실한 때에 스스로 발목을 붙잡는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보수적인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주체적으로 참배 시기를 결정해야 하는데도 외교문제 때문에 앞당겨 참배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총리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혀라"고 다그쳤다.

북핵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지금은 동북아 국가들 간에 두터운 신뢰에 바탕을 둔 협조체제가 아쉬운 시점이다. 일본 내에서조차 비난이 일고 있는데도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뒤 "한국.중국과의 우호관계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변했다.

그는 "어느 나라든지 전통과 문화를 존중해야 관계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주변국의 입장에서 보면 말장난에 불과하다. 총리가 침략전쟁 주범들을 군신(軍神)으로 추도하는 종교시설에서 공식 참배하는 일이 피해국가들로부터 존중받아야 할 '전통'이고 '문화'인지 되묻고 싶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쌓이는 것이다.
오대영 도쿄 특파원 day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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