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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를 가르는 소프라노 이중창 소름돋는 스릴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6호 24면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5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레 미제라블’의 흥행 돌풍을 두고 온갖 정치적 해석이 난무하지만, 이 영화가 만약 뮤지컬 영화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러닝타임 내내 휘몰아친 노래들이 그토록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면 저 오래된 고전이 이토록 우리를 사로잡았을까? 1985년 초연된 이래 28년간 막을 내리지 않고 있는 원작 뮤지컬 자체가 위대한 음악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방대한 고전의 압축이라는 무대 위 최대 난제가 비장하거나 서정적인 음악의 완급조절로 아름답게 해결되자 드라마 각색의 구조적인 부분은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뮤지컬 ‘레베카’ 3월 31일까지, LG아트센터

뮤지컬 ‘레베카’가 주는 느낌도 비슷했다. 뮤지컬로서는 다소 낯선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를 성공적으로 무대에 안착시킨 것은 역시 음악의 힘이었다. ‘레베카’는 ‘엘리자벳’ ‘모차르트!’ ‘황태자 루돌프’의 계보를 잇는 빈뮤지컬. 유럽 뮤지컬의 거장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 특유의 웅장하고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강한 중독성에 미스터리의 긴장감까지 덧입은 음악의 감동은 빈뮤지컬 팬들에게 기대 이상의 충족감을 선사했다.

이 무대의 또 다른 키워드는 ‘히치콕’. 스릴러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유일하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동명 영화(1940)에 영감 받은 작품이다. 1938년 출간된 스릴러 소설의 고전 대프니 듀 모리에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지만 영화의 노선과 가깝다. 감동적인 러브스토리가 주류를 이루는 대극장 뮤지컬의 특성상 순수한 사랑의 힘이 줄기를 이루지만 히치콕의 스릴러답게 뒤틀린 인간심리로 왜곡된 도착적 사랑의 강렬한 기운이 무대 전체를 넝쿨처럼 휘감고 옥죄어 온다.

1년 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 부인 레베카의 그늘에 묻혀 사는 부유한 남자 막심 드윈터와 사랑에 빠져 새로운 드윈터 부인이 된 ‘나’. 신데렐라가 된 기분으로 맨덜리 저택에 입성하지만 죽은 레베카의 존재에 강하게 집착하는 집사 댄버스 부인과 막심의 불안한 태도는 ‘나’를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는다. 댄버스 부인의 음모로 곤경에 빠진 ‘나’는 레베카 죽음의 실체에 한 발 접근하게 되고, 막심의 위기가 고조됨과 동시에 레베카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증폭돼 간다. 대체 레베카는 누굴까. 그녀는 왜 죽었을까. 모든 남자들에게 숭배받을 만큼 마법 같은 매력을 지닌 그녀는 과연 그 망령조차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일까.

미스터리한 분위기 더한 무대 미술
레베카는 무대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오로지 음악의 힘으로 강한 존재감을 부여받아 객석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검은 옷 한 벌로 일관하는 댄버스 부인(옥주현·신영숙)이 부르는 메인테마 ‘Rebecca’는 인간의 목소리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독성 강한 선율이 파워풀한 가창력과 만나 레베카의 카리스마를 확고히 구축해 낸다. 막심의 ‘칼날 같은 그 미소’도 못지 않은 폭발력으로 그녀의 존재에 무게감을 더한다. 폭풍우 치는 발코니에서 댄버스 부인과 나, 두 여인이 벌이는 기 싸움 이중창은 단연 압권. 음습하고 강인한 메조 소프라노와 청아하면서도 날카로운 하이 소프라노의 음색이 충돌하며 소름 끼치는 명장면을 연출할 때 레베카의 망령은 분명 거기에 있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지탱하는 데는 무대미술도 한몫했다.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법한 음산한 대저택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나선형 계단과 벽면을 불규칙한 배열로 빼곡히 메운 크고 작은 액자들은 쏟아질 듯 불안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조성했다. 비구름이 쉴새 없이 몰려오는 영상을 뒤로 한 해안가 절벽 세트는 실제로 바람에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였고, 엔딩에 영상과 실제를 절묘하게 중첩시켜 대저택 전체를 불길로 집어삼킨 화재 신도 강렬한 스펙터클과 함께 곧바로 극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잘 짜인 플롯을 통한 드라마의 팽팽한 긴장감은 없었다. 죽음의 경위가 고백을 통해 싱겁게 밝혀지고 마지막 반전도 드라마틱한 연출 없이 설명적 전개로 일관돼 놀라움과 충격을 동반해야 할 미스터리 스릴러의 매력은 반감됐다. 촘촘한 복선의 교묘한 장치 없이 드라마틱한 음악과 미술만으로 조성된 서스펜스는 사랑과 의지로 운명을 극복한 로맨스로 전복돼 심심하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결말에 여운은 없었다. 물론 이런 아쉬움도 거센 음악의 파도에 삼켜져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 이 무대의 미덕이다.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불길한 아우라를 뿜으며 레베카와 소통하는 댄버스 부인의 처절한 절규만이 오래도록 우리의 뇌리에 남겨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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