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440억 중 연구개발에 100억 쏟아부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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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령 대표가 15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루트로닉 연구실에서 피부과 치료에 쓰이는 레이저 기기의 성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태희 기자]

지난해 말 일본·캐나다·호주·러시아 등 11개국 피부과·성형외과 의사 70명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사흘간 경기도 고양시에 머물며 한 중소기업에서 레이저치료 기법 등 새 의료 기술을 배우고 갔다.

 세계 전역의 의사들에게 의료 기술을 선보인 회사는 레이저·광학 의료기기 전문기업 ‘루트로닉’. 기미 치료, 피부 재생, 흉터 제거, 미세 성형 등에 쓰이는 레이저치료기 12종을 생산하는 회사다. 외국 의사들이 자비를 들여 이 회사를 찾은 건 루트로닉이 피부 관련 레이저 의료기기 분야에서 세계 10대 기업인 데다 각종 신제품을 개발하는 기업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이 회사를 이끄는 이는 미국 예일대 경제학과 출신의 황해령(56) 대표다. 유학 시절 산업용 레이저기기 판매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한 게 사업을 차린 계기가 됐다. 황 대표는 “레이저기기는 광학·전자·정보기술(IT)·기계 기술이 복합돼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인 솜씨라면 미국보다 더 잘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선진국에 수출하는 회사로 키우겠다’며 첫발을 내디뎠지만 하필 그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왔다. 황 사장은 “아파트를 팔아 사업 자금을 대는 동안 몇몇 직원은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아가며 출근했다. 그래도 뚝심 있게 제품 개발을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1999년 기미·주근깨·문신을 제거하는 제품이 처음 출시되면서 회사는 성장을 시작했다. 이 제품은 이듬해 국내 치료기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2001년엔 미국 제품만 쓰던 대만 병원이 주문을 해왔다. 대만 대리점이 일본 영업 인력에 추천하면서 일본 수출길도 열렸다. 현재 국내 피부과의 65%가 루트로닉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품질 좋은 기기를 잇따라 내놓자 유명 의료기 브랜드들로부터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의가 쏟아졌다. 그러나 황 대표는 모두 거절했다. 그는 “당장 눈앞의 매출을 좇기보다 내 기술, 내 브랜드를 탄탄히 다지면서 내실 있게 성장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황 대표는 성장을 위한 승부처는 연구개발(R&D)이라고 본다. 현재 이 회사 임직원 192명 가운데 30%가 R&D 인력이다. 매출액의 20%가량을 신기술 개발에 투자한다. 지난해에도 440억원의 매출 가운데 R&D에 100억원, 임상마케팅에 30억원을 쏟아부었다.

 황 대표의 ‘기술 최우선주의’ 경영은 조만간 큰 결실을 거둘 전망이다. 실명(失明) 예방·치료에 쓰이는 레이저기기가 임상시험 단계에 있다. 미국 하버드대와 협약을 맺고 이 대학 부설 병원이 갖고 있는 치료기술 특허를 상용화하는 일이다. 이 기기의 임상시험은 유럽에선 오는 6월, 국내에서는 9월께 완료된다. 황 대표는 "이 치료기가 보급되면 당뇨 합병증 등으로 실명 위기를 맞은 환자들이 한 번에 130만원씩 하는 안구 주사를 맞지 않아도 시력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루트로닉은 2010년 지식경제부가 선정하는 우수제조기술연구센터(ATC)로 지정됐다. 황 대표는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R&D에 매진해 피부·안과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의학적·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기술을 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TC(Advanced Technology Center)

지식경제부가 제조 현장 기술력 강화를 위해 2003년부터 매년 선정하는 기업 내 우수 부설 연구소. 시장 점유율 세계 10위권 이내의 상품을 보유한 기업들 가운데 평균 5대1의 경쟁을 거쳐 매년 15~30곳을 선정한다. ATC엔 인증 마크가 붙고 연간 3억~5억원씩 최대 5년간 R&D 자금이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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